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너무 상식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도 그렇지만 상식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근간 중의 근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안다면 생각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사 모른다고 해도 신앙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또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적어도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기도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그 하나만으로 이미 세상은 온전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실수도 않으시는 신으로 믿으면서 세상이 문제가 많으니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과 그 경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선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분명히 기준에 의하여 구분된 정의입니다.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어떤 나라에서는 선한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아주 악한 것입니다. 테러나 전쟁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알고 하나님의 선함을 본다면 사람이 가진 선함의 기준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선함 이외에 도덕적인 관점, 사회 정의적 관점 등을 기준으로 선한 것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상용구 혹은 무정의 용어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쓰는 말만 온전히 알아도 신앙의 의문점은 상당히 아니 모두 없어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으니 그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의 모든 ‘선함’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 그 하나뿐이라는 것, 그 하나만 온전히 믿으면 신학과 같은 것은 개밥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바울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들의 내용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용어가 예전 이스라엘 시대의 언어적 개념과 그 시대 사건들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표현이나 내용은 지금 아주 쉬운 용어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시절에 문자를 읽고 쓰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운 용어나 개념을 사용했을 리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정론이 그렇습니다. 바울 서신에 예정론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단지 목적이라는 것은 모든 구현된 것의 예정된 것이라는 정상적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치 안에 있는 ‘예정’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복잡한 이론으로 만들어서 예정론이 된 것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라고 하신 이 한 구절의 말씀 안에 성경의 모든 근간이 다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아주 쉬운 말들뿐입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선한 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주 하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선한 것인지를 생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배우면 됩니다. 학교는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선함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가진 선함이 과연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여기시는 선함과 같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비인격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묵살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도살하듯 죽이시는 사건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을 인간 존엄이 무시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만 놓고 보더라도 선함의 기준은 당대에게 존엄성은 고사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잔인함이 되기도 합니다. 흑인 노예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국인들이 흑인 노예를 사냥하듯 잡아서 자기 집에서 부리면서 그 흑인들이 차려 놓은 음식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 선함은 행동의 어떠함만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함,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함은 지극히 하나님의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이 자기 마음에 시비 거리가 되거나,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논쟁, 선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관적 기준이라는 이 하나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자요 성도라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증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이 온전히 순종이 되어 모든 선함이란 그 하나님의 주관적 가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란 선함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관적 시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이 이해되고 의문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보증이 아니라도 그것이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엄청 어려운 것이 되거나 아니면 대충 시계추와 같이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문에 쌓인 신앙생활을 자기 기준에 늘 부정한 자기 삶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면책으로 여기고 살면서 막연히 그 삶이 천국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선함은 하나님의 기준에 딸린 것임을 의심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만 분명하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심,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 구원과 의, 그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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