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10) 의와 행위의 관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6. 09:02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에 대한 정의는 이미 흐릿해져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자신의 죄를 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폐가 있습니다. 구원은 죄를 사함 받은 것인데, 구원을 받은 다음에도 늘 죄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도 자기 행동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자기 행위로 인한 죄의 문제를 구원 받은 다음에도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를 스스로, 즉 어떤 행위로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이를 사해 주시므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면서, 자기 행위에 대하여 구원을 받은 다음에 다시 자기가 살면서 짓는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들 그리고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것을 두고, 교회에 와서 세례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은 매일 기도할 때 회개하는 것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람들은 스스로 압니다. 그런 삶이 자신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문제는 의와 행위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신학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위가 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의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에 종속되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시인하면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든지 자신이 가진 안목으로 그 말씀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행위는 의의 산물입니다. 즉 행위는 의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행위는 그 행위 주체가 가진 의를 분별하고 알 수 있게 할 수는 있지만 행위가 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시인한다는 것도 시인하는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먼저 그 안에 자신의 삶이 죄인과 같았다는 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가 죄를 시인하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행위가 의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죄를 시인하는 그 행위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 받은 다음에도 자신이 일상 속에서 범하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고민하고, 또 해결책으로 모든 기도의 시작을 회개로 하라는 것과 같은 방법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고 회개하기 전에 죽으면 어떻하지?”와 같은 질문 앞에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은 의의 본체이시고, 한 편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의가 중요하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행위는 의에 표현이기 때문에 의만 분명하면 행위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합니다. 그것은 무지함입니다. 그 무지함은 일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같은 의,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의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분명히 그 방향성이 의가 행동과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 성경 보는 것과 같은 것이 행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바로 행함이 하나님의 의의 판단에 근거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바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지 자신들이 행위로 지키는 의가 신약성경에 나온다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이 아니라고 맘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이없지만 또 다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시니 사람의 행위는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을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주 흔한 반문인데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함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심령 안에 있어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이 도둑질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께서는 행함을 보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행함은 의에 종속된 것이고, 의는 형식을 가진 존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그릇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생에게 보이시고 사람의 심령에 들어오시는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를 바로 안다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심도 같은 이치입니다. 행함이 없다는 것은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니 그 의를 표현할 행동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움직임이 없는 시체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행함입니다. 도덕적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덕이 귀한 것이긴 하나 하나님의 의에 비길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한 형태로서 도덕적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와 행함의 관계가 자기 안에서 분명하게 인식되는 사람은 은혜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창조주시며 우리 인생의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드리면서까지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 본능과 같이 인식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것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고, 의와 행함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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