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1-22) 누가 이방인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8. 06: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운명론적인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절대적으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목적은 존재 이전에 있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는 사람이 가진 집을 지으려는 목적이 집이나 설계도 그 보다 항상 먼저이고, 집이 어떻게 지어지든 그것은 그 집을 지으려 한 사람의 예정하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모르면 예정은 운명론적인 것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할 사람을 객체로서 예정하셨다는 식의 말과 주장과 그것을 학문이라면 떠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목적을 모르고 있다고 실토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느냐의 문제는 단지 예정론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다는 것은 예정하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늘에 앉게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도, 죄 사함도 없을 뿐 아니라 육신으로 할례를 받았든 아니든 이방인입니다. 즉 이방인이냐 아니냐는 혈통이냐, 신약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그 목적을 알고 그것이 삶의 목적과 본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때에는 육체로 이방인이요(엡 2:11)”라고 한 것은 에베소 교인들의 혈통이 유대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 말씀 이전 10절에서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이방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이것은 알면서 이방인을 논할 때 하나님의 의가 본성과 생명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도무지 성경을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기준으로 보니 그런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시대에는 이방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유대인이 아닌 혈통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은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이 아니라 서구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종교 프레임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교회에서 교리대로 세례를 받고 그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것이 아니면 유대인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유게에 할례를 행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으로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 육신이 어떤 종교 프레임 안에 있느냐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프레임이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은 이유는 종교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추구하는 바를 어떤 신에게 어떤 교리로 구하느냐의 차이일 뿐 모두 ‘육신’의 문제를 종교로 해결하려는 것이니 그것은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개념 같지만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사람의 창조 목적이자 우리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서 스스로 자기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목적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목표에 가까운 것입니다. 목표는 목적이 있고 정해져야 하는 것인데 목적도 없이 목표만 정하고 그것을 가지고 목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방인의 기준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육신으로 유대인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혈통이 다르고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유대인과 동일하게 인정하는 것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혈통이나 육신의 모양이나 삶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이방인이라는 이 간단한 기준으로 사람을 본다면 언제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면 그것으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과 밖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이방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있었던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시기라고 2장 12절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보면서 누가 이방인인지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넣어보려고 계략을 궁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가진 기준에 의하여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저런 핑계 같은 이유들을 끌어와서 자신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회칠하고 싶기 때문에 이방인이 누구인지 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것 보다 더 온전히 다스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제 아무리 어떻게 자신을 채색해도 이방인입니다. 신학박사? 목사? 장로? 오히려 이방인의 증거인 신분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세우고 다시 사람을 모으고 그 안에서 제도로 인침 받은 신분이 육신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신이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것은 생각만 해 보면 아는 것입니다.(엡 2:11) 왜냐하면 피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본성의 상징입니다. 남성의 DNA곧 본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의 보증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남자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로 그리스도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그 십자가의 도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잉태되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자기 안에 본성이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삶은 이방인의 삶이요, 거듭난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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