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곧 신실한 사람들의 사랑에 관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교회가 된다는 배경을 설명합니다. 교회가 모일 공간을 준비하고 목사 자격증 가진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시작하면서 바울 사도가 예정에 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형식적으로 볼 때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앞선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 사도가 어떻게 서신을 기록하였든 저자인 바울 사도가 의도하는 바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수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사랑 안에 있는 성도와 예정함을 입은 사람 그리고 바울 사도가 교회로 여기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자기 심령의 어떠함은 무관하게 육신이 교회에 등록되어 있고, 그래서 일요일이면 예배당이란 건물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쉽게 성도라고 하는 시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자신의 모습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성도에 합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예정하심에 순종된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이 있어 교회가 되는 교회에 속하였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신앙의 터전이자 기반입니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것이지만 한편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미 형성된 교회에 대하여 어떤 고찰도 없이 그저 교회로서 바로 수용해버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교회를 아무런 고찰 없이 교회로 인정하고 신앙생활을 할 거라면 교회에 만족이 되고,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곳을 교회라고 인정하는 것에는 어떤 거부감도 가지지 않으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신 교회에 순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분명히 있음에도 서로 모여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고, 유투브에 있는 설교 무엇이 좋다고 말하고, 교회의 행정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알고자 논쟁한다면 좋을 텐데 모든 관심과 논쟁이 형식에 관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업시간에 딴 짓하고 학원이나 동영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종교인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방향성입니다. 교회라는 건물과 목사라는 자격을 기반으로 외형을 먼저 갖추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자격을 취득해서 설교를 잘하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방향이 교회의 기반이 되는 요소들을 먼저 갖추고 그것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라는 생각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교회가 되는 정상적인 방향이라면 예수님께서도 먼저 교회부터 세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계실 때는 율법에 의한 회당은 있었지만 교회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교회에 대하여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심령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렇게 서로 만나서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에 서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을 나누며 공동체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교회는 먼저 건물이나 목사라는 자격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불렀을 때 그 부름에 합당한 심령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그 예정하신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인 것을 순종한 사람들이 그 심령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생명 가진 이를 찾아 만나고, 각자가 세상에서 육신을 소비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삶이 서로에게 위로와 의미가 되는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일 때 그 모임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 중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적은 인원이 모여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정작 이 말씀에서 가장 핵심은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 외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란 곧 정체성을 말하는 것으로, 사과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사과라는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사과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진 생명 정체성, 곧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이므로 교회가 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그 예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와 존재 정체성으로 삶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며 하나님 아들인 것입니다. 그들 안에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있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과 같이 자기 심령에 있는 본성을 좇아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성도며, 그들이 예정하신 자들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면 두 명이 만나든, 온라인에서 만나든, 전화로 만나든, 글로 만나든 그것이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채워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먼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성도요 예정하신 자들이 모이는 것이 먼저고, 그렇게 모이니 교회가 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향과 다르게 형성된 교회는 역사가 몇 천 년이 되었다고 해도 예배당이나, 종교단체일 수는 있지만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건물에 십자가를 올려놓는 것은 무덤에 회 칠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먼저 지어 사람을 모으는 그 습성대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하고, 형식인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요 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본성대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를 찾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남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만나 교회에 속하고 몸의 지체가 되듯 교회의 일부인 존재가 되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이것과 다르다면 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다니고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밥 먹듯 한다고 해도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곳은 회칠한 무덤이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곳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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