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5-23) 성도를 향한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7. 08:32 Writer : 김홍덕

사랑이라는 하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반대로 사랑에 대한 누구의 정의도 서로에게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듯 사랑이 그 누구라도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고,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는 사람이기만 하면 사랑의 대상과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기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져야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자력으로 태어나거나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특별히 사람이란 존재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바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고찰하고 그 고찰 속에서 어떤 것이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어떤 이들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남녀가 사랑하면서 때로 ‘너는 내 존재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또 부모들이 자녀를 위하여 살면서 그것을 자기 삶의 의미요 목적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 그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 것은 참 숭고하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 존재하고 난 다음에 부여된 의미요 목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사람’이란 존재로 존재하게 된 그 이유와 목적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사랑에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살게 된 삶을 살아가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존재하게 된 의미까지 알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로서 주어진 다음 자신이 인식한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의미로서 사랑을 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본질적으로 존재하게 된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자녀나 연인에게서 찾는 것은 가진 돈으로 연인을 위하여 혹 자녀를 위하여 아끼지 않고 지불하는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누가 그 돈을 주었느냐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이 일하고 돈을 벌 듯 인생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또 자기 육신으로 수고한 열매를 가지고 연인에게 자녀에게 또 자기 자신의 인생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런 저런 모양의 사랑이라고 이름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인생을 누가 주셨는지, 그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 힘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조차 아닌데 그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수고를 바탕으로 그것을 알려고 합니다. 과학이나 이미 인간으로 존재하기에 가질 수 있는 철학으로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과학적인 기술이나 지식도, 철학적 사고도 인생으로 존재하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돛단배 안에서 선풍기로 돛에 바람을 불어 배를 움직이겠다는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듯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인생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자기 삶의 본질적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게 하신 이 외에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들 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라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알고, 고장 났을 때 가장 잘 고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사랑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가장 본질적은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 안에서 존재하게 된 인생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 안에서 사랑하는 그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임도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성도의 사랑을 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이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존재하게 하신 의미를 알게 하는 존재들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라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는 그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신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알도록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종과 같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너뛰고 제 아무리 세상이 사랑이라 이름하는 행위를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즉 성도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숭고한 희생으로 사랑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들은 성도의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 존재의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행여 사람들 눈에 사랑으로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한 의미를 모른 상태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랑 같은 것은 영화 주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사랑, 성도의 사랑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행하려면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계신 창조주이심을 믿고 그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와 본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들은 사랑은 오직 그것뿐이며,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도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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