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몇 차례의 글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예정론’이라는 것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것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개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예정은 a man에 관한 것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이 예정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예정하심에 순종하면 이는 하나님의 본업이 성취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을 때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예정하심의 내용을 1장 12-13절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 약속을 믿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듯 개인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운명론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않겠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아주 묘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뻐할만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이 기뻐할만한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뻐하는 일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하는 것이고, 그들도 그것을 얻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육신의 수고로 충분히 얻는 것들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그것을 충분히 얻어내기도 합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차이를 두고 구분하려고 합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그 잘됨이 부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생각하면 악한 일이고 악인이라 규정하고 악인이 흥하는 것이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와 그곳에 등록된 종교인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기뻐하는 것, 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기뻐하는 그것을 단지 교회에 다니는 자신이 이루었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기준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런 생각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은 목적에 수반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나 영광이나 은혜나 복의 척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곧 인생에 대한 뜻이 순종된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차를 산 사람이 기름을 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넘치게 사람 타는 자리까지 넣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듯, 하나님께서 육신에게 주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수행하는 것에 적합하게 주시는 것일 뿐, 육신이 차고 넘치게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쌓을 곳이 없게 주신다는 것은 적재라는 개념이 아니라, 항상 사용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겠다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3편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뜻을 세상에 말씀을 하시고 펼쳐 놓으시고 심지어 아들을 보내어 보이셨는데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뜻하는 바가 있어서 물건을 사거나 만들었는데 그 뜻하는 바가 행하여지면 기뻐하는데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드신 사람도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업, 본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는 그 의를 나타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주주의는 선거나 자유와 평등 등으로 표현되고, 자본주의는 시장 경제로 표현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의는 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함 없는 믿음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 의가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이고, 그것이 표현된 존재들이 그 기업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서신에서 기업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고 하나님의 본업의 소산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업을 잇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으로 여김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사이에 성령의 인치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거저 신비로운 것으로 여기지만 성령의 가장 본연의 정체성은 말씀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의, 세상 만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로 전해지고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보고 그것을 순종하고자 할 때 그 순종하는 마음이 생명이 되게 하여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면 본성을 가지게 되고, 본성이 있다면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면 성경은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잉태되는 것도 속에서 되듯,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알아지는 것이지 밖에서 글로 속으로 넣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치심, 성령의 잉태하심이 있어야 구원을 받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니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을 들었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였기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생명이 된 것이므로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생명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니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겪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 있는 본성이 하나님의 의에서 잉태한 생명이므로 본성 자체가 하나님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이렇게 될 것이 아니라면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육신으로 얻기도 하는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사로운 기쁨이기는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 예수님으로 인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본성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귀한 것들을 보면서 억지로 참고, ‘난 저것 보다 귀한 예수가 있다.’며 다짐하는 것과 같은 본성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학교에 넘쳐 납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공부한다는 것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모릅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광고시간에 광고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만드신 목적대로 피조물이 순종되었을 때, 그것 하나에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본업이지 기업이며, 그 뜻하신 대로 된 자들은 그 소산이며, 그 소산이 되었다는 것은 또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자며 같은 것을 기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이라는 예정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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