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생각에는 육신이 평안하고 육신의 삶이 존중 받는 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존재이므로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그 안에서 평안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브레이크는 그 목적이 마찰을 이용하여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마찰로 인한 열과 고통을 멀리하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있으면 그 존재 자체가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상해고 찢겨도 온전한 것이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전혀 무관하게 사용이 된다면 그것은 아주 불행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의 인생도 육신의 평안이 기쁨이고 성공이며 선한 것이 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육신이 소비되고 때로 종과 같이 수고하여도 그것이 보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종과 같아 보여도 존재 목적 아래서 온전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택하심을 말씀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기쁜 듯대로 된 것(엡 1:5)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서 그로 인하여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시험에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종속된 존재가 아닙니다. 인생이 고달파도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합당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하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겠다고 하는데, 그들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자리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찢기시고 상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지으신 목적대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 가서, 또 그 이름으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것이 과연 온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쁨에 대하여, 또 만족함과 평안에 대하여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육신의 삶에 기준을 둘 것인지 아니면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에 기준을 둘 것인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악몽과 같은 인생이 된다면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뜻으로 우리를 예정하셨다면 그 예정 안에 들어 있는 사람도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고 하고, 살면서 겪는 일들마다 ‘괴롭고 힘들다.’ 한탄하면서 그것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말 자체로도 모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자체가 모순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이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적어도 인생은 기쁨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믿는 여부와 무관하게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아니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기쁨과 평안을 목적 안에서 볼 것이냐 육신의 상태로 볼 것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브레이크와 같이. 브레이크가 창고에 적재만 되었다가 불용품으로 분류되어 버려지면 그 삶이야 평안하기 그지없겠지만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듯 인생도 육신의 평안을 기쁨의 기준으로 삶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심 = 세상에서의 평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나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은 제 아무리 사는 형편이 나아져도 육신이라는 그 근본이 세월에 의해 약해지고 소비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이란 존재는 소비되는 존재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인정해도 신앙은 아주 달라집니다.


우리가 언제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예정하신 뜻을 가장 온전하게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오늘 내가 추구하고 기도하고 바라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인지를 늘 반추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즉 소비하여 하나님 아들이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보이셨는데, 나는 그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한다면,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회칠까지 해서 구하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희롱당하지도 않지만.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입니다. 육신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부모의 의와 생각이 육신을 가진 자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 곧 하나님의 성품을 형상 있는 존재로 하여금 표현하게 하시겠다는 그 뜻이 예정하심이고, 그 예정하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진 의가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주시고, 그 육신이 세월과 함께 노쇠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살면서 다양한 감정으로 해석되는 일들을 겪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인생의 목적이라는 예정 안에서 살면, 그 삶에서 겪는 일이 사람이 보기에는 화난 것이고, 또 우는 것이고, 때론 불행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그 예정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우리 삶의 모양이 어떠하더라도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순종하면.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자기 삶으로 표현이 되면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아들로서 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생명을 얻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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