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의 말씀 중에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예정론>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사…”(약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약 1:5)과 같은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는 것에 있어 예정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했다.”라는 논리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그럼 선택받지 못했다면 믿어도 소용없네?”라는 반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대화가 명쾌하지 못하다면 말을 한 사람이 불분명하게 했거나 아니면 듣는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해석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충돌에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틀린 말을 하실 리 없다.’라는 것까지는 믿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알기 쉽게 말씀하셨다.’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아리송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정론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이 큰 받침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을 논하는 것에 있습니다. 육신을 본질로 본다는 것은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예수님께 미끼로 던졌는데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의 복이고, 육신이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렵게 되면 벌이라는 생각, 그래서 육신이 평안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영광이라는 생각은 육신이 신앙의 본질이고 척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이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이들이 예수님께 기도하고 사도들의 말을 좇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하니 그마저도 육신의 삶의 단위를 예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을 하나의 예정하시는 객체로 보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으셨다는 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어떤 사람이 택하심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이 택하심을 받지 않았는지 분석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하나님께서 택했다고 정의내린 사람의 삶을 좇아가는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a man에 관한 것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 어떤 습관을 가진 사람, 어떤 신앙적 신념을 가진 사람, 어떤 신학적 수준이 있는 사람, 어떤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는 사람 등으로 특정되는 한 개인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졌기에 그것을 예정하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 사도는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성도라고 한 사람, 신실한 자라고 한 사람,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하였지, 어떤 특정된 사람을 예정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셨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을 인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예정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은 어떤 정체성 곧 the Man에 관한 것이지, a man을 예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만 알아도 이것은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창조 목적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인생의 본질이 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우리를 예정하사…”에서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예정이나 계획이라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예정도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예정됨이 증명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실현되거나 나타난 것이 없다면 예정은 그저 몽상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라고 칭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올 때 비로소 그 예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니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시고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정체성이라고 순종한 사람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받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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