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바울 사도가 주제처럼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한 알의 사과가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나, 하나님께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범위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지키는 생활 안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본성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같아서 그로 인하여 자기 삶이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셨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도 오늘 우리가 보는 그런 신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자신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스스로 철떡 같이 믿었는데 막상 하나님 앞에서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을 인한 후회를 인함입니다. 그 후회가 영원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뜻대로’와 같은 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거의 상용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셨고, 하나님은 아들을 그렇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과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자기 육신의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고,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고, 자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봐서 간과하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사람들은 “저가 누구 길래 이렇게 하는가?”라고 했지만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백부장은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사람들을 만드신 목적이 이루어진 순간은 예수님께서 육신이 평안하실 때가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소비하였을 때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먼저 알고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시고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a christ이기에 the Christ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고, 오히려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예수님과 반대로 육신이 평안을 얻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고 믿어도 해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 아니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자기 존재의 목적과 정체성으로 삼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고 또한 그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그런 삶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씨를 아버지에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부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문안에서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 것도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존재 자체와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주셨기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셨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도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늘이 변하면 땅의 모든 것이 변하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땅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인생도 모든 것이 그에 따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신령하다는 것도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가지신 복이란 의미인데, 이는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신령한 영)이 바로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나타내실 형상 가진 존재가 있어야하기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바로 알면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을 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는 것은 교황이 낀 어부의 반지와 같이 형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고, 그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시겠다고 하신 그 뜻이 바로 천국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근간입니다. 태초가 열리는 것도 물리적 세상의 시작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인데,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시작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사람으로서의 태초가 열린 것이고, 갓 입학한 학생은 학교와 학생으로서의 세계가 열린 것이듯,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므로 그 영이 가진 생명의 본성에 따라 열린 안목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가 바로 천지 창조인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거듭난 것입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났기에 어제와 같은 것을 보아도 그 의미가 다르고 목적이 달라서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것과 같아서 어제까지 세상을 살면서 왜 사는지 몰랐기에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없고, 늘 세상이 왜 이런가 궁금하기만 하다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자기 안에 있어 그 영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밝아져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육신을 가진 우리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을 지으시고 살게 하신 뜻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보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지가 안에 생명이 되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신령한 것입니다.


이 신령함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영이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알게 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기 안에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신령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인생으로서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이기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복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세상에서 형통한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존재한 다음에 있는 일들이기에 먼저 존재의 목적부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을 아는 복을 받고서 살아가는 삶에는 그런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처할 줄 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복은 신령한 것, 곧 신비한 하나님의 영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기에 이 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형편을 보고 욥의 세 친구와 같이 말하지만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있으면 좋고, 닥치면 그것을 취할 수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가지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복이라면 예수님도 십자가가 아닌 황금 보좌에서 하나님 아들임을 나타냈을 것이고, 바울 사도도 감옥이 아닌 높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복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바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시고 육신의 삶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을 먼저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의인 것입니다. 그 의가 있어야 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과 육신의 형편은 그에 종속된 것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걱정할 것도 아닙니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 기름을 넣지 않을 리 없듯이 하나님께서 그 목적하신 바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부유하게도 하실 것이고, 또 필요하다면 십자가에 매달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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