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의 서신서 시작에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는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평강의 주체, 곧 주시는 이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듯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기서 ‘우리’와 ‘주’는 앞서 편지의 수신자가 단어가 아닌 그 심령으로 지정되어 있듯, 어떤 사람에게 이 은혜와 평강이 임할 것인지를 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바울 사도가 편지의 내용을 마치 암호나 암구호처럼 기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편지를 기록했지만 그 의도한 바는 바울 사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을 많은 사람들이 읽지만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이러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예정론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단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같은 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들끼리의 말입니다. 즉 형제들이 그 아버지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주(Load)’ 또한 같은 말입니다. 같은 분을 동일하게 ‘주’로 부른다는 것은 그 또한 같은 주를 섬기는 종들 간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한 형제로서 서로를 인정할 때 함께 부르고 알아듣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편지의 수신자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신실한 자라는 것도 바울 사도를 외모로 보지 않고 그에게 있는 계시를 보고 그를 사도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듯,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정체성으로 보는 사람들이어야 ‘우리’라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하나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교파가 갈라질 일이 없겠지요. 교파가 갈라졌다는 것은 마치 자신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갈라져서 싸우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파가 다르고 세례와 침례를 가지고 다투는 이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서로에게 우리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때로 사람들 생각에 그 원하는 바가 성경에 기초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겨 자신의 기도가 자신의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회칠한 무덤처럼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소망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렇듯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면 누가 주인입니까? 사람들의 생각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 되지 않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집주인이 전기 기술자를 불러서 공사를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내 힘으로 얻을 수는 없어서 누구를 불러서 그것을 내가 차지했는데 부른 사람이 그것을 해 주었고 그 일에 대하여 주관하고 있다고 그 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하인처럼 부리며 능멸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입이 설사 예수님을 주로 부른다고 해도 예수님이 주권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저 알라딘의 램프 안에 있는 요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정이 램프 밖으로 나오도록 성경을 자기 육신으로 지켜서 불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또 예수님을 주님이라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 또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바울 사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 그것을 인하여 바울을 사도로 보는 사람, 즉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사람들이어야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이며, 또한 그런 사람들이어야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그렇게 버릇에 가깝게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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