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2) 은혜와 평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4. 25. 11:05 Writer : 김홍덕

‘은혜와 평강’은 바울 서신의 인사에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 포스팅에서도 설명을 몇 번 한 바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 주어진 것을 말하고, ‘평강’ 곧 평화 혹은 평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없는 것 중의 하나로 ‘공짜’를 듭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생 그 자체는 자기 힘으로 얻지 않은 공짜인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공짜인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든 사실 모든 것이 공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소유하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더욱이 어떤 미련한 이들은 하나님께 가서 또 자기가 원하는 삶을 기도하니 참 가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에서부터 누구나 벗을 수 없는 죽음을 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공짜를 이야기할 때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가장 크고 유일한 일은 오히려 존재하게 된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은혜, 곧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생이란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의“ 곧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로 구분하면 완연하게 다른 것이 됩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소비하는 것에 온전한 존재로 보는 이들이 있고, 육신의 소비가 아니라 평안이 하나님의 복인데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은 육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이것을 신앙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인이란 아쉽게도 거의 다 후자에 속합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것에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인생이 소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비된다는 것은 그것에 사용됨으로 약해지고 낡아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급적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치라 여겨지는 것들을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가장 흔하나 말로 세상에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가 또 선교사나 주의 일에 헌금하는 것이 자기 은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단정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로서 교회나 주의 일에 기부하듯 하는 자리에 이른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지 않는 자리, 평안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는 것이 아니라 발 씻기는 자들에게 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모호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이 구분되니 않으면 거듭난 생명이 아닙니다. 아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육신으로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육신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여 십자가에 드리는 소비고, 반대로 육신의 정욕을 좇아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생명의 구분이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히 거듭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 사도가 은혜와 평강을 마치 한 단어처럼 항상 붙여 사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곧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생으로서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이후에도 스스로 그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데 인생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 목적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평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이라고 하면 육신이 무탈하고 등 따시고 배부른 평안 중에 있어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에 다니는데 지장이 없고, 또 교회가 헌금이 필요할 때 여유 있게 낼 수 있는 것이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심으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을 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하신 분을 주라 믿으면서 정작 자신은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단지 구하는 평안은 같으면서 구하는 방법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기에 세상과 다르다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회 칠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것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눈이 어둡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눈이 어둡다는 것은 아직 빛이 없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창조조차 되지 않은 것인데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기니 더 문제인 것입니다. 뭐가 바뀌고 나아지려면 현실 인식부터 바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으니 신앙이 여전한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노력할 뿐이며,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본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 곧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가진 평안의 가치와 다르게 육신을 소비하는 것에서 평안이 있고, 그 평안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고, 따라서 인생의 목적도 하나님께 있으며, 그 인생의 목적은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하게 살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안하구나!’ 생각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육신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일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임을 아는 그것이 은혜고,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이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세상이 볼 때는 육신이 평안하지 않아 보이니 평안도 아니고 복도 아니며 보잘 것 없고 조롱하는 것과 같은 삶인데 그것이 자신에게 평안이 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면서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말씀하신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항상 문안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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