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You At?
Where You At? by godserv 저작자 표시비영리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은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꾸중할 때, 기본적인 관심사는 "Do"이다. 다시 말해서 "무슨 짓을 했느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담 역시 먹지말라고 한 것을 먹은 나쁜 행동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아담이 숨었기에 그렇게 물으셨다고 하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 무한하다. 당신이 창조한 아담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에덴 동산 어디에 숨었다고 못 찾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를 분은 아니라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데, 왜 질문이 "어디에 있느냐?"였을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 속의 "어디"라는 것이 장소의 시각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지금 나무 뒤에 있느냐? 아니면 나무 위에 있느냐? 하는 것과 같은 장소(place)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에게 아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경의 기본적인 관점을 이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경의 말씀이 행위에 관한 것이거나, 현상계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지창조가 이 현상계의 창조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존재 규범에 관한 말씀이고, 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고, 이 땅 위의 나라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나라들이 있는 것이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질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중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은 어떤 행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선악을 알게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그것과 같은 상태가 된 존재, 즉 선악을 알게 된 상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질문의 핵심인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았던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부끄러운 상태 곧 잘못된 것이고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아담의 상태를 물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먹지말라고 한 것을 어긴 행동에 관한 질물이 아니라, 지금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창세기 3장(7~11절)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다. 부끄러워서 옷을 해 입었으면 된 것일텐데, 그것이 왜 두려운 상태라는 것인가? 이는 마치 길 잃어버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상실된 두려움을 아담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을 것을 고하였느냐?"라고 다시 물으시면서, "네가 먹지말라고 한 실과를 먹었느냐?"하신다. 다시말해서,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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