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선악과라는 것은 아담과 같이 어떤 것은 부끄러운 것, 또 가려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스스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외면하고 다른 의의 기준을 부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을 선악과를 먹었다고 표현하시고, 그런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선악과의 말씀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당연히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죄, 특히나 모든 죄의 뿌리와 같은 것을 보시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가진 선의 기준이 창조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각각 다른 것과 연관성이 있다.


그럼, 사람은 왜 각자가 생각하는 선의 기준이 다른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에 앞서 현재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각종 종교에서도 무엇인 선한 것인가를 연구하고, 신앙하면서 설교하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노력들 조차 각각이 추구하는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근본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 선악과를 먹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분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단언컨데 사람이라는 존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오직 사람의 행동과 소유와 같은 형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얼굴이 다르듯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 다 다르기에 그 다른 만큼 갈등이 있고, 또한 그 만큼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려 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모이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선>과 같은 것을 선으로 여기는 <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 세를 모아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주장하는 모든 선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의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과 외모를 판단의 대상으로 두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른 것이다. 예로 간음이라는 행동에 대한 기준도 나라마다 다 다르다. 심지어 에스키모인은 외부 남자에게 자기 아내를 잠자리에 내어주는 것이 최고의 접대였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 간음이지만, 사람의 왕래가 드문 에스키모인들에게는 근친혼들로 인한 유전적 열화를 막기 위한 생존의 관습이었다.


살인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살인의 가치가 달라진다. 오히려 많이 죽여야 선한 것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비단 이런 흔치 않은 상황이 아니라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주변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실재로 한 신혼 부부가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을 것인가, 설탕을 찍어 먹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다투기 시작한 것이 양쪽 집안의 문화를 비난하게 되고, 결국 이혼한 사례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오늘 하루 일과를 돌아보면, 알고보면 별 것 아닌 것인데, 내가 해 온 방식, 내가 옳다고 하는 방식들이 달라서 이견을 보이고 조정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동과 형식에 대하여 각각의 기준이 다른지 알고보면 정말 놀라운 것이다. 


반면에, 오늘 당신은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상기하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 보았는가? 다시 말해서, 사람을 사람이라는 그 존재 자체로 보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선악과를 먹은 삶을 사는지 발견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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