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47) - 선악과와 교회(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4. 16. 17:18 Writer : 김홍덕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 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 선악과의 문제는 교회의 정체성과 연관된 문제이다. 선악과의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양의 희생이 있었다. 그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 씨앗이 되게 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그리고 그 구원 받은 이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셨다.(마 12:28, 눅 11:20) 이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로 알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죽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일은 없다. 운동 선수가 훈련장에서 훈련한 적이 없고, 선수로 등록된 적이 없는데 본 경기에 나설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튼 선악과를 먹은 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된 양으로 예언 되신 예수님은 교회의 시작인 것이다.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에서 생각하면 교회의 정체성은 간단하고 간결한 것이다.  


이 교회는 모든 것을 선악 간에 판단하는 것이 근본인 세상의 심판들 앞에서 패배자로 또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사람들이 그런 낙인의 상처를 위로 받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런 심판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안식을 누리게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이유든지 사람을 기준에 따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누는 것과는 무관한 곳이다. 교회가 경계할 것은 오직 하나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는 기준 그 하나만 멀리하면 되는 것이다. 행여 그 기준이 신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신앙이 없는 사람도 평안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신앙적 양육은 삶을 보여줌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고백하듯 스스로 돌이킬 수 있게 하면 되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원수가 밤에 가라지를 심었을 때 뽑지 말고 추수할 때 까지 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교회는 도덕적으로 또한 신앙적으로 순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이미 어떤 기준으로 선한 것만 골라 담기 시작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능을 많이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신앙이 없고,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없어도 교회 안에서 하는 일에는 얼마든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꾸미는 것도, 신앙 없는 사람이 자신을 우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선 뼈가 발라지듯 하는 것도 교회에서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방주가 교회에 비유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안에 부정한 짐승도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정함은 당연히 사회적이고 세상적이며 사람들이 가진 육신의 안목에 의하여 부정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다. 즉 세상적 안목으로 볼 때 부정해 보이는 것이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말을 타락의 대표성을 띈다고 말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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