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는 그렇듯 사람을 볼 때,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관점이다. 이는 사람 자체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과 또한 한 사람의 행동에 있어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는 것 모두 다를 포함한다. 사실 이는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진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지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대표적인 공동체가 가정이다. 가정이라는 곳은 사회적인 역량을 기준으로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함이 덜하다. 법적으로도 가족의 범죄를 은닉하는 것은 무죄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그 구성원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 보다,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가 더 우선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가정을 가장 원초적인 안식처로 인식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가정은 늘 지켜내려고 한다.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 세상적 관점을 피하여 쉴 수 있는 공동체의 안식을 사모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본다면, 사람은 서로를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을 갈망하고 그런 상태에서 안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즉 사람은 사람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 받을 때 평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선한 것은 무엇이며, 그 사람의 악하고 연약한 것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비록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런 판단이 없는 자리를 편하게 여긴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사람이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사람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을 볼 때, 돈이 없다고 멸시하지 않는 것이고, 욕망이 있다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앙이 없다고 죄인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까지 와서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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