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39)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3. 9. 11:08 Writer : 김홍덕

이 말씀을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고 만족하셨고 그런 존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안식 하셨는데 반해 사람은 그 육신을 보고 연약하고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시각은 바로 뱀의 유혹과 같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마음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의 관점이 생기는 것을 사람의 일생으로 본다면, 뭐랄까? 철이 들면서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순간부터 이다. 그것이 바로 뱀의 유혹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나는 것은 죄가 아닌 것이나, 그 육신을 바라 보는 관점 자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삶을 보는 관점은 다 그렇게 시작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호소나 믿음을 청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시간은 한 개인이 그렇게 되는 시점이 언제 인지를 말씀하는 것이고, 성경의 모든 상황과 역할은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존재라는 것과 그런 행동과 삶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 전체를 놓고 이 성경을 봐야 한다. 즉 개인의 출생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개인이 세상을 습득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 개인 안에, 또한 그 개인이 바라보는 개별적인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세상은 각양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를 가진 다양한 형태인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시작되는 것을 천지창조라고 한다. 즉 이때 까지 세상을 보면 자기의 세계가 형성되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췸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중심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과 생명 나무를 두셨다는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육신으로서의 삶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의 만족의 중심이 되도록 목적 안에서 살아 갈 때는 에덴 동산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육신의 삶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여 산다면 그것은 혼돈 속에서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삶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천지창조도 없는 삶이고, 선악과를 먹어 부끄럽게 여긴 것을 덮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에덴에 두셨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선악과를 에덴의 중앙에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지었다는 것은 창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악과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과 대상으로 먹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육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형성되는 것은 뱀의 꾀임과 같이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가치 기준에 따라 이 육신을 부정하고 그것을 개량할수록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뱀의 꾀임이다. 즉 육신을 부인할 수록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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