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라기 보다 하와가 뱀을 만나듯 사람이 자라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서 점점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에 둔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육신을 가진 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삶을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텐데, 하와에게 뱀이 한 말과 같이, 이 세상을 자기 안에 수용해 가면서 점점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외면하려 하고 좀 더 고상해지려 하고, 40일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이, 더 고상해지고 금욕적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여 율법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인간임을 감추려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육신의 삶을 선과 악으로 먹어 버리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에 두셨다는 것은 인간을 육신으로 지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려고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려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것을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은 것과 같이, 이 육신을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했듯 세상을 보고 그것을 좇기 시작하는 순간이니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와가 먹어 문제가 되었듯, 사람도 이 육신의 삶을 하나님처럼 되게 하려는 그 순간 선악과를 먹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 자체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은 선악과가 에덴에 존재한 것 처럼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만 그것을 에덴의 일원으로 두느냐? 그러니까 이 육신이 하나님의 동산에 적합하게 살아가느냐? 아니면 이것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앞에서 칼에 대하여 설명한 적이 있는데, 가정에 있는 식칼이 가끔 끔찍한 흉기가 되기도 하는 것을 언론에서 볼 수 있다. 식칼에게 날카로움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사용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벗어난 사용이라는 것이 우리가 뉴스에서 봐서 알듯이, "내가 선하고 너는 악하다"는 의지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목적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은 육신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것이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다 할 수 없는데, 사람의 존재 목적을 벗어나 삶을 이끌어 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 되는 것이다. 식칼이 흉기가 되면서 목적을 벗어날 그 때가 사람이 자기 주장을 관철 시키는 순간이듯, 사람이 그 목적을 벗어나는 순간의 이유는 삶을 자기의 것으로 먹고, 그것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과 세상을 보고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설명하는 사건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불순종의 사건이 아니다. 이것을 불순종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명령에 대한 불복종의 행동이 아니라, 창조 목적에 대한 불복종, 불순종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벗어난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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