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혼자 조용히 인정하는 것이야 뭐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율법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사람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 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창조하고 방치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선악과와 관련하여 가장 궁금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는, 우리는 늘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려는 마음과 그것을 절제하는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인생들이기에 성경을 나의 이야기로 받아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살고 있는데, 그것을 참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간다면, 그것은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면죄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씩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먼저는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면, 이는 어떤 면에서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알면서 선악과를 두셨는가?' 하는 것이나, '본능 표출의 자유'라는 쟁점에 비해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이때까지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 자신을 복종시키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쉽게 자신의 것의 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왜 부정한 짐승도 태웠는가? 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의 방주에 왜 부정한 짐승을 태웠는지를 모른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을 태운 것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가 문제가 될 줄 몰랐을까?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 왜 만들었을까? 하는 문제와도 당연히 연결되어 있고, 거의 기본적이고 필연적으로 이런 문제는 <영지주의>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가? 하는 문제까지 연결된 종합적인 관점의 시작인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