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이런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는 구원인 것이다. 생물학적, 의학적 죽음에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와 십자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이다.


<죄>라는 것의 어원은 '하마티어'이다. 이것은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 자리는 지리적 좌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의 자리, 좀 이해를 돕는다면 '학생이 학생다워야지?'할 때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의 죄는 어떤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셨던 창조 목적의 자리에 사람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셔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사람의 어떤 요소들을 악한 것으로 분리하고, 그것을 정죄하고 개조하려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명백한 반역인 것이다. 그것이 죄고 그것이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상태에서 원래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의 자리로 사람이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과 추함, 즉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그 기준 때문에 죄인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죽으신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기사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면서 까지 당신이 가지셨던 그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과정에서도 단호하게 보여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송사를 했지만 그것에 대하여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으셨다. '성전을 사흘 만에 짖는다더라' 등등 그런 행적에 관한 송사는 일절 대답 않으시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마 26:63)"는 심문에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라고 답하시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라고 묻는 빌라도의 말에, "네 말이 옳도다(마 27:11)이라고 답하셔서 죽음을 자초하셨다.


즉, 다른 많은 송사들은 아무리 인정하고 사실이 되어도 죽을 죄는 아니지만, 단 두 가지 죽을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송사에만 그렇다고 답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바로 유대인의 왕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그 말을 하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것이다. 선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유대인이나 로마인들의 눈에는 도저히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 초라한 인간의 모습,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야 하는 그런 인간의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유대인의 왕이 되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초라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을 바쳐서 그것을 보여주신 은혜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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