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21) - 선악과와 십자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6. 00:15 Writer : 김홍덕

베드로나 제자들 마저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은 하기 힘들어서 어려운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되겠는가?'하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반문이 사람을 망설이게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중등부 전도사님이 그 당시에 많은 학생들이 가지고 싶어했던 <파카45>라는 만년필을 설교 중에 갑자기 "이것을 아무에게나 줄테니 원하는 사람은 나와서 받아가라" 라고 했는데,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가지고 싶었지만 '설마'싶었는데, 교회에 잘 나오지도 않던 신입 회원이 나가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학생의 것이 되었다. 그건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40일 금식기도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면, 그것 못하는 연약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또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면, 모든 분야에서 1등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그래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공평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이기만 하면 그 모습 그대로, 일정한 주기로 배설도 해야 하고, 젊은 날에는 넘치는 정욕을 불사르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고, 배고프면 훔쳐서라도 먹고 싶고, 나를 괴롭히는 것에는 화가 나는 모든 인간,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일주일에 2번 이상 금식하고, 창기와 세리와 놀지 않아야 하고, 언제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수록 더 메시야에 가까워지고, 당연히 메시야는 그런 삶의 최고봉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육신으로 오셔서 이 모은 의문과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속박을 푸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인간의 추한 모습들을 스스로 악한 것으로 규정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욕구와 연약함을 감추고 고상해질수록 더 선한 것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되고 그것을 연단 시켜 왔던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쌓기 위해 벽돌을 구워 단단하게 한 것처럼 말이다.(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벽돌을 구웠다는 것은 사람을 연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인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 창조의 목적인 인간의 정체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은 자수하지 않은 간첩이 기부하고 선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무엇을 행할 것이냐?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 누구인가? 하는 것만 정해지면 그것에 맞게 행하는 것이 생명이다. 경례한다고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경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선악과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사람의 모든 모양과 인간의 모든 관습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를 악하게 규정하고 부끄러워한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여주심으로 그것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선악과와 십자가의 관계이고, 에덴동산에서 바쳐진 양과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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