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람의 모습은 알고 보면 참 초라하다. 사람들이 치즈 케익을 먹을 때, 부스레기가 떨어질까 조심하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나이가 많던, 잘 살던 못살던, 그 얼마 안되는 부스레기에 조심하는 이유가 뭘까? 옷에 떨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아까워서 일까? 여튼 사람은 그렇게 찌질하다. 그리고 서로가 감출 뿐 알고 보면 모두 다 똑 같다. 인간이라서,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잘 차려 입고 만나는 사람들은 예절이 있다. 밥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 뭐는 어떻다 등등. 마치 대변도 보지 않는 사람들처럼 고상하게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 고상함을 깨는 것에 대하여 서로 얼마나 조심하고, 그것이 깨졌을 때, 불쾌해 하고 더 나아가서 상대를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고상하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는 기준이 있어서 이다.


이러한 기준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마디로 사람은 혼자 있거나 가족끼리 있을 때는 자유롭게 있다 상대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사는 기준이나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그 모든 기준이 같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행동과 소유의 어떠함이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 그 안에는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심판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는 기준을 수립했다. 그것에는 예의라는 것에서 법이라는 법이라는 강력한 것 까지 다양한 단계지만 동일한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감출수록 선한 것이 되고, 그런 것을 잘 감추는 사람일 수록 훌륭한 사람이 되는 법 아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그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 땅에 왔다고 하면서, 창기와 세리와 놀고, 사람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하여 만든 법들을 무시하니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아들은 정말로 화장실도 안 가는 그런 고상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길에 서서 기도하는 고상함이 모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군대와 맞서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라하게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십자가에 죽어가고 있으니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 하니, 다 도망갔고, 빌라도의 뜰 까지 따라 갔던 베드로도 여종의 질문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그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생각한 메시야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어가는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그 분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즉 배신이 아니라 혼돈 속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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