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이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역행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구원과 영광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고, 종교 안의 계율을 잘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본성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악한 것을 배제하고 선한 것을 추구해 온 노력에 대한 치하로서 구속과 종교적 영광이 주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전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절제하면 할수록 더 좋은 결과를 낳은 것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다고 그 본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을 때 까지 있는데, 사람이 만든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그것을 통제한 상태로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에 역행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사람의 본성을 억제하는 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보시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들이 억제하고 숨기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오신 분이 바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기만 하면 다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성직자가 된다는 식의 발상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으로 세운 것에 반항하는 행동인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이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삶이 있었기 때문이지, 결혼하면 신앙이 안 좋은 사람이고, 사도나 사제 혹은 성직자가 되려면 결혼을 하면 안되는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금욕적인 것을 신앙의 모습으로 보는 것은 사람을, 또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시대 상황, 나라, 문화 무엇보다 개인별로 다 다른 기준으로 감추고, 그렇게 감출수록 선한 것이라는 생각과 이론 속에 사람들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선을 주창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늘 시끄러운 것이다. 선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시끄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탑에서 말이 달라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양의 관점에 따라 선한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가 인간이라는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구원이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 되려면, 인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야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다.


인간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은 제사장과 같은 종교적 신분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황제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세리와 같은 마음이 있기에 예수님은 세리와 친구였고, 또 누구나 음욕을 가지고 있기에 창기와 친구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들과 친구셨던 것이다. 


즉 그런 세리 같고, 창녀 같고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본성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by claude.attard.bezzina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고서, 이때까지 세상의 법과 각양의 사람들이 나에게 들이대는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죄인이 되었던 나의 정체성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에서 구원이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의 전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제사장들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또한 로마 황제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지도 못했으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도 로마 곧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죄인이 된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게다가 그런 자리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 까지 보여주신 것이다. 즉, 세상의 법과 종교적인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된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고,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손과 발에 못 박히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또 자신이 가진 신분이나 지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벌거벗겨진 것이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존재구나 깨달을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고, 에덴 동산에서 희생 당한 어린 양의 모습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같이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을 부끄럽지만 극복하고 고백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알기 이전의 상태, 곧 인간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상태, 다시 말해서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알고 판단하는 죽은 자리에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은 자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보기에는 멀쩡해도 시간이 가지 않아 죽은 시계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두신 목적을 상실하여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하여 가죽이 된 어린 양과 같이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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