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14) - 가죽 옷과 예수님의 구속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9. 09:4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경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개를 구원하시려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로 오셨을 것이다. 또 아니면 우리가 더 강한 모습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사자나 호랑이로 오셨을 것이다.


아담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여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했다. 무화과 나무의 잎으로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다고 했다.(창 3:21) 이것은 별다른 이견 없이 양의 가죽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자신이 인간이라서 부끄러운 것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렸다는 의미이다.






그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고 믿고 가르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대속>이라는 것이 버스 차비 대신 내어 주듯, 죄는 우리가 저지르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그렇게만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멀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동등한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부끄러워 해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데 격이 많지 않는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때려도 아프지 않고, 화도 내지 않고, 피도 안 나고, 잠을 자야 할 만큼 피곤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라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을 위하여 겸손하게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모습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이 땅의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부터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와 같이 피곤하고 화도 나고 때리면 피도 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모습, 우리와 같은 그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이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양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보조고 그것을 나의 신분으로 삼으면 그 부끄러움이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은 차비를 대신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그 삶을 볼 때, 그 분이 나와 같은 사람이고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내가 인간이라서 부끄러워 했던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구속함 안에서 보니, 나로 하여금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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