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16) - 무화과 나뭇잎과 유대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22. 09:08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선악과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추어 우리가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존재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인간이 우리의 모습이 추하고 더럽고 부끄럽게 여겨 그것을 내 삶에서 분리하는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선악과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인가 하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에 더러운 생각을 가진 것을 회개하고, 또 형제를 욕한 것과 도적질과 같은 행동을 회개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육신의 것을 더럽게 여긴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하여 기록하여 놓으신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선악과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잡고 그 가죽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셨는데, 이것을 잘 살펴보면, 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표현하는 것인데, 양의 가죽으로 입혔다는 것은 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이 양은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므로,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은 신분으로 입히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우리가 선악과에 대한 말씀을 보고 우리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듯,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구속을 얻은 것인지 알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는 것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먼저는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구속을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행위에 관해서 라면 예수님도 그리 떳떳한 분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 예수님을 신앙하는 입장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다소 불경스럽게 비칠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의 관습과 문화 안에서 보면 예수님은 아주 불량한 한 사람이었다. 행위에 관해서 라면 말이다.


당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이고, 유대교의 율법이 사회의 근간이던 시절이었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법과 예의와 에티켓과 같은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것 같이, 유대인들도 율법을 행함으로 인간의 더러운 것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더럽고 추하다는 기준 역시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화과 나무는 유대인의 나무이다. 이는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담도 무화과 나무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렸는데, 유대인들도 율법으로 사람을 부끄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그래서 율법으로 경건하게 살아서 그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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