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이 선악과 문제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는 자리, 곧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떠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자리에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매겨 놓으신 사람의 자리가 있는데, 적어도 그 자리가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요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형식이고, 그 표현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바로 육신이라는 형식을 입은 사람이라 생각하셨기에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육신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며, 또한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 왜 생겼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스스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사람이라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연약하다. 동물의 세계로 본다고 해도 육체의 능력이 상위권이라고 할 수 없다. 힘이나 속도 등 모든 면에서, 그리고 물 속이나 공중에는 아예 접근이 안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보다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본능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능적인 행동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자기도 그런 본능이 있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물 위를 걷고, 죽은 뒤에 살아나느냐? 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말했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을 영지주의라고 하며 이것은 초대 교회 시절 가장 심각한 신앙적 문제였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이시고, 또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걷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그것을 따라 하라고 그것을 보이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천지창조가 물리적인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기적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천지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이 물리적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만드신 것이라고 제한적으로 읽는 것이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잘못된 관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이 영지주의를 낳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육신의 본능에 따라 식탐이 있고, 이성에 대한 욕구가 있는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며,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그런 것을 가진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이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라고 했고, 찌르면 물과 피가 나오는 분이시며, 십자가에 매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신 분이었다. 우리의 육신과 같은 그 육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육신을 가지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내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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