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12) - 벌거 벗었다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8. 09:20 Writer : 김홍덕

이렇듯, 사람은 사람이라 연약한 것에 대하여 늘 부끄러워 한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해결하려고 행동하고 소유를 늘려간다. 그리고 그 가진 것을 기준으로, 또는 사람이라 부끄러운 것을 가리기 위한 행동의 어떠함과 소유의 정도가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된다. 즉, 많이 가지면 선하고, 도덕적이면 선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이것이 다 삶의 본질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제쳐두더라도 사람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그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알카에다의 폭탄테러도 그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신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막는 것이 선한 것이다. 



알카에다는 자신들이 선하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911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 서로 다른 것을 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들 중에 이 세상의 사람 누구 하나 빠짐없이 공감할 수 있는 표준화된 선이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 행동의 어떠함과 소유의 어떠함으로 판단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해적이 아무리 자기들끼리 의리가 끈끈하고 그 사회가 잘 돌아가고 그 안에서 행복하더라도, 국가에 반항하는 단체로 있는 한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죄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은 그 존재 목적이 회복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스스로 옳다 여기는 선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또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하나님께 더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죽은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계를 대할 때, 아무리 그것이 고급 시계라 할지라도 시간이 맞지 않다면 그것을 보고 우리는 "시계가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바로 그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상황이 되게 내가 선악과를 먹고 소유와 행위에 대한 선함과 악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삶에서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할지라도 이것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에게 보석을 박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 사람이 지금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 아담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아담 역시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몸이 철에 비해 약하고, 바다에서는 물고기보다 못하며, 하늘에선 참새보다 못한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본성에는 성욕과 식욕과 같은 본성이 또한 그대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벌거벗은 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는 도무지 어떤 때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에 그 벌거 벗음이 유익함을 알고서 살아가는 그 상태에 있을 때, 그 때는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네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리에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네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 자리에 있느냐?"> 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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