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늘 자기의 생각보다 육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삶이 모자란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생각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든 생각들은 인간의 능력을 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렇다.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좋겠다', '투명인간이면 어떨까?' 같은 것에서, '저 사람의 마음을 내가 움직일 수 있다면......', '배우자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같다면......', '잠 안자고 공부할 수 있다면......', '금식기도를 잘 할 수 있다면' 등등.


하지만 현실은 그런 것들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누구나 이성에 대하여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생각들을 한다. 그래서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 처럼 행동하고, 그것을 이기려 노력하고 심지어 기도한다. 하지만 늘 실패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원래 그렇게 만드셨다.


또한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는 고상한 모습을 보이려 한다. 마치 화장실도 가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도시미 교차로 CCTV에 잡힌 1인 운전자의 신호대기 모습에 가장 많이 잡히는 모습이 코 파는 모습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혼자 있을때 하는 행동과 사람 앞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것이 사람이다. 왜냐하면 혼자 있을때 하는 모습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이런 것이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사람이 이렇듯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 수 없고, 고상하고 싶어도 안되고, 자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아무리 절제하려 안된다. 삶에서 이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오죽했으면 머리 깍고 절에 들어가서 여자를 멀리하며 사는 중이나,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의 삶을 택하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육신을 가리려 옷을 입고, 육신의 기본적인 생존적 행동이 배설에 있어서 갇혀진 공간을 만들어서 해결한다. 또한 좀 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집에서의 모습을 잘 공개하지 않는다. 이런 모든 것을 감추며 산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이기는 것이 삶에 대한 의지가 있고, 또한 도덕적이며,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했고, 이것을 제어하는 모습들을 <선>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뭇잎과 같이 이내 말라 버리고 만다. 사람들의 노력이 늘 허사가 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생각들은 사람들 상호간에 선과 악으로 판단하게 되는 기준이 되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모습을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 하는 것이 삶을 사는 존재로서 얼마나 선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관원이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선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반문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육신을 가진 나를 선하니 악하니 하는 기준을 가지고 판단했느냐?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라고 하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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