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8-17) 빚진 자(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6. 12:0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는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진 자라고 한 것은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한정된 것도 아닙니다. 이는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빚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사람의 존재 목적, 곧 하나님 앞에 있는 빚이 그것인데, 그 빚을 갚는다는 것이 결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그 누가 봐도 ‘아! 저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고 복음이구나!’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복음을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자신을 하나님께서 조성하셨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 곧 모은 사람에게 복음을 나타내는 빚을 갚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금만 신앙에 관심이 있고 또 하나님을 잘 믿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빚을 갚는다는 것, 복음을 전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의 실체에 있습니다. 여기에 상당한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의 삶이란?



빚진 자의 삶을 생각해 보려면, 먼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태도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 그리고 그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과 다니는 사람들이 가진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적선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수고로움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러니 내 말 들으라.”는 식입니다. 수고로움이란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아무리 대단하고 힘들고 창피하고 수고로운 것이라고 해도 자기의 의와 고상함과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지 상대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빚진 자로서 전하고, 종과 같이 섬김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 소위 말하는 노방 전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대적으로 그런 전도 방식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인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1980년 여름에 전국전인 전도 운동 ‘나는 찾았네!’와 같이 말입니다. 노방 전도는 전도하러 나서는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전도하는 것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울역에서 그렇게 전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길거리를 가고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전하는 사람 입장에서 의롭고 힘들고 수고스러운 방식을 선택했다고 전도가 힘들며, 그것을 감당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힘든 사명이라고 스스로 높인 것일 뿐입니다. 듣는 사람, 들어야 할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적선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것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런 전도의 방식과 그런 전도 방식을 생각하는 사고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잡으러 군사들이 왔을 때에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서 그들을 물리칠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하셨지만 결국은 그들에게 끌려 가셨습니다. 즉 그들의 방법,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입니다.


이 예수님의 법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어떤 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방식과 의로움과 원하는 것에 죄인처럼 드리는 예수님의 법은 자신이 가진 복음의 의로움이 부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하는 법이 아닙니다. 의로움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이 주장하는 의로움 앞에 죄인이 되신 법입니다. 


이 법을 알고서 전도를 한다면, 사람들이 원치 않고 시끄럽게 여기는 노방 전도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식 앞에서 죄인과 같이 끌려가서 그들의 의에 의하여 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과 같이 끌고 간 사람이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고 그것이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능력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빚을 갚는 삶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빚진 자라는 것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의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 앞에서 죄인이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에게 빚졌다면 헬라인이 의롭게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므로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다는 의미고, 야만인에게 빚졌다는 것은 야만인들의 선함과 의로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으시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신 예수님의 법으로 빚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그 누구라도 그들 앞에서 빚졌다는 것은 그들의 의로움 앞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생명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예수님의 생명과 같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목적을 빚진 자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멘이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을 앞세워 사람들을 대할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을 앞세워 사람들을 대하면 사람이 믿음 없음을 책망하게 되고,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자라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빚졌다는 것은 사람의 혈통이나 내면의 어떤 다양함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을 인하여 다른 사람, 그가 혈통이 어떠하든, 내면과 생각이 어떤 사람이든, 심지어 신앙이 어떤 사람이라도 죄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의 삶, 그렇게 자기 의가 죽은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삶, 죽은 것 같고 죄인인 것 같은 그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생명과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온전해야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거듭남이고 부활인 것입니다. 빚은 그렇게 갚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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