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8-17) 빚진 자(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5. 16:11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기에 그 복음을 받아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에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일면 생각하면 듣는 사람에게 복음인데 전하는 사람이 감사할 일이 무엇인가 싶겠지만 바울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기를 전하는 것으로 삼았으니 누군가가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 정체성을 두고 있는 바울 사도와 같은 이들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나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세계로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돈을 꾸었거나 아니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에 이렇게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체감 상 당연히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빚>은 어떤 빚인가요?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나오는 죄를 영어 성경에서는 debt 즉 빚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킹제임스 버전-최근 버전은 주로 sin으로 기록) 이것은 옛날에는 죄 지은 자나 빚진 자나 다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자는 그 죄 값을 다 치를 때까지 빚진 자와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당시 헬라인이나 야만인과 같은 이들에게 뭔가 갚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요되는 비용을 자신의 기술인 천막 깁는 노동을 하여 벌어서 충당하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갚은 것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용역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에 조명을 밝히기 위하여 전구를 하나 샀다면 그 전구는 나에게 빚이 있습니다. 내가 그 전구에 대한 계획과 구매하거나 만든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전구는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전구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전구는 죽은 것입니다. 목적 안에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목적이 있었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빚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행하실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인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빚진 자인 것입니다.


그 존재의 목적,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진 빚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연상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보고서 ‘저 사람의 삶과 말을 들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겠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혈통으로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또 그 사람의 삶이 모양이 어떠한 사람이든 무관하게 자신은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전하고 살아 내어야 하는 빚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진 빚인데,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이 교회를 세우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 들였으니 바울 사도는 빚이 탕감 받은 것과 같아서, 그 채권자이신 하나님께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인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바울 사도가 전한 이 로마서의 비밀을 알고서 그 놀라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우리가 로마서를 대하는 바른 모습일까요? 아니면 로마서를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로마서를 잘 아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다 유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런 것은 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감탄하라고 한 고백이 아니라, 이 로마서를 보는 모든 사람도 다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에 ‘바울은 정말 겸손한 사람이야’라든가, ‘바울의 안목은 정말 놀랍고 로마서는 정말로 대단한 책이야’라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로구나!”하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없는데 하나님께 빚을 갚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 아래 거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빚진 자라는 것을 안다면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삶이라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이루어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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