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7) 부활의 능력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2. 10:4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시라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야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모습, 정체성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복음이 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 질 때에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세계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이 된다는 복음이듯,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의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에 대하여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적이라는 것이 그렇고, 모든 인생이 죽음을 맞이할 것인데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산다고 하니 대단히 각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제가 요한복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 죽음이나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고, 선지자와 또 사도들 중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였지만 그 다시 산 사람들 역시 죽었고, 부활하신 주님도 하늘로 가셨으니 지금으로서는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나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육신이 죽고 다시 산 증거가 없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다음에 남과 다르게 다시 살아난다는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능력이라면 당연히 가벼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도 다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진정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었기에 살리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이 맞이하는 죽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막역히 생각하지만, 부활은 반드시 예수님과 같은 죽음이 있어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고 또 죽었을 때 비로소 부활의 능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복음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시고 죽으셨는데, 그 죽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전히 산 것이었기에 살리신 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 때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힘들고 늘 죄인이 되고 패한 자가 됩니다. 돈 앞에서 그렇고, 권력 앞에서 그렇고, 고상함 앞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늘 상대적인 패배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패배와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종이 되지 않으려고, 죄인이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수고함은 그쳐지지도 않고 또 이겨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세상의 가치관과 맞서 싸우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백조가 미운 오리새끼에게 ‘너는 백조야!’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모든 인생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그 가치관이 본질이라 여겨서 늘 이기려고 하는 소득 없는 수고로 일관하면 곤고한 삶을 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이 바로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철저히 패하는 십자가를 순종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인생은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보이시고 그것이 자기 정체성임을 순종하라고 전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십자가는 죽음의 틀이 아니라 생명의 거룩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을 본질로 알고 그것에서 이기고, 그 세계에서 왕이 되고 이긴 자가 되기 위한 존재라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 존재의 목적이 회복된 것이기에 그것이 생명이 있고 산 것이라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죽음 아래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되고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힘입는 자가 되는 법은 우리도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들 역시 오늘 세상의 가치관과 그 법아래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법으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