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인생에게 복음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본다면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망의 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다고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있어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모든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다른 것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렇다면 그 아들 역시 세상의 주인입니다.


‘다윗’은 왕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왕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오셨다는 것, 왕이라는 것은 자기 세계를 자신의 의로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의로 다스리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신의 의로 세상을 다스림과 같이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는 모든 사람 역시 왕과 같이 자신의 세계를 의로 다스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뜻대로 되는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예수님은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라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 나라 이스라엘의 왕, 곧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예수님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복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간혹 그러기도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렇지 않을뿐더러 단 한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일이 있었다면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니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주장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정말로 왕인가 싶기도 합니다. ‘도무지 어떤 세상의 왕이란 말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많은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그 모든 어려운 일, 곤고한 일, 화나고 짜증나며 슬픈 일들의 뿌리와 같이 공통된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자기 맘대로 된다면 그 일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기 맘대로 된다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에게 ‘네가 왕이다.’라고 인정해 준다면 나름 복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맘대로 되는 세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버스 하나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버스가 온다는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제때 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세상이고, 그래서 내가 왕이라면 왜 맘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것이 아닌 이유는 다른 것 아닙니다. 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구매한 것은 내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해도 됩니다. 사자 바로 부셔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들어 온 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자라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식하고 보니 세상에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자신의 의와 뜻대로 세상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함을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신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대적하고 하나님과 겨루며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세상이 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자기 관점과 안목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뀐 안목으로 보는 자기 세계, 그 세계는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육신의 삶과 세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심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면 이 세상이랴 말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니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의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수도 없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뜻대로 하시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푸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세상에 속하여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자신의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세상의 의로 사시는 분이니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육신이 원하는 일이 자기 맘대로 되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삶이 되어 사는 존재가 되므로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고 뜻대로 되는 삶, 곧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로 사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이며, 불만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의를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모든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되고, 만족이 되며, 안식이 되고, 평안하며, 항상 감사하고, 언제나 기쁜 존재가 되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억지로 할 이유도 없고, 신념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복된 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이고, 또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알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복음인 것입니다.(예수님이 오심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고 만족의 동산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 곧 삶이 된 사람이 사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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