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7) 예수님이 왜 복음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15. 21:58 Writer : 김홍덕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이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 누구와 무엇은 간절한 관계일 것입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누구이기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험생에게 있어 합격 소식은 간절한 것이고 합격이라는 말이야 말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두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누구에게 복음인가 하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인류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복음인지도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간절한 분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사람들이 복음으로 여기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것이 사람에게 복음’이라며 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계서 전하고자 하신 맥락과 같은 맥락에서 사람에게 복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이 간절해도 바닷물을 마시면 안 되듯, 예수님께서 복음이라고 하니 자기의 모든 간절함을 예수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은 <무엇이 간절한 것인가?>입니다.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간절함이 있고, 그 간절함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시기에 예수님이 복음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간절함>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간절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통적이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볼 때 모든 인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있으면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조차도 간절함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명제들은 철학적인 고찰이라는 선입견을 주지만 알고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생의 꿈은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돈이라고 해도,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가 돈이라고 하는 사람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 자신의 답이 돈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은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왜 사는지, 인생이 무엇인지로 표현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간절함, 나는 누구며, 왜 사는지에 관한 답을 보여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듣고 그것을 복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내린 결론, 돈이나 명예와 같이 세상의 것이고, 애굽의 것을 구하면서 그것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복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저의 글을 꾸준히 보시는 분들은 이것이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지 아시겠지만, 오늘 처음 저의 글을 보신다면 지난 얼마간 예수님께, 또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마음으로 바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돌아보신다면 스스로가 무엇을 복음으로 여기는지 아실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겨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도 누구나 구하는 것에 있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가지게 되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구했다면 아직 복음의 표면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런 분들에게 있어 성경은 참 의문스럽고 성경대로 살기 힘들 것이며 행여 성경대로 살지 않아서 벌을 받으면 어쩌나 염려하실 찌도 모릅니다.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보면 자신이 바라는 것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는 것을 벌로 여기고, 건강이 악화되는 것, 심지어 약속시간에 맞춰서 타야 하는 버스나 지하철 놓치는 일이 생기는 것조차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얼마나 예수 믿는 믿음이 세상적인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벌이라는 것이 대부분 세상의 것,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시는 것은 우리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해결에 대하여 기도하면 들어 주시기 때문에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니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시다 보니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을 상실한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고, 하나님이 속에 거하시기 위하여 빈 그릇과 같이 지어진 인생이기에 자기 안에 끊임없이 채우려는 그 배고픔을 채우시는 주님, 인생의 정체성을 채우시는 예수님이시다 보니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천 명을 먹이게도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게 하시는 예수님의 본성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상실하여 마치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와 같이 죽은 인생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인생에게 복음이고, 사람이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몰라 느끼는 공허함과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복음이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만 해결되면 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동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동차를 산 사람이 기름을 넣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겠다고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먹고 마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 주시기에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껍데기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복음인 것은 ‘사람이 왜 사는지?’,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게 될 모든 인생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니 그 뜻도 하나님이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이신 것은 바로 이것,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육신의 어떠함이 신앙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 그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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