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신앙 여정을 출애굽으로 이야기 해 보면 애굽에서의 종살이 하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아가는 때가 있고, 홍해를 건너서 정해진 규율을 지켜야 살 수 있는 광야의 삶을 살듯이 성경말씀을 규율과 행위의 규범의 준수를 육신이 바라는 것을 위한 지불로서 살아가는 세월이 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발길 닿는 대로 자신의 땅이 되듯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살 뿐인데 그 모든 것이 복음의 삶이 되는 시절과 사람이 있다.


그러한 과정으로 볼 때 광야에 있는 사람에게 옛 신앙과 옛 세상은 애굽의 시절일 것이고, 가나안에 있는 사람에게 옛 신앙과 옛 세상은 애굽의 시절과 광야의 시절 모두가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쓴 이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으므로 우리가 볼 때 이 수신자들은 애굽이나 광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복음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기에 그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세계의 일원이 된 사람이다. 이것은 교회에 가서 세례문답을 하고 교인이 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런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종이쪼가리나 공식화된 증명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증 받으려 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 안에 스스로가 아무리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것을 늘 확인하고 살며, 무심한 듯 살아도 불연 듯 자기 안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한 삶에서 충분히 보증을 받을 수 있고, 그 보증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확신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교회의 명부나 증서나 행사에 참여나 출석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을 인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가진 생명의 안목으로 음란과 거짓과 육신의 욕망은 옛 신앙이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게 달라 보여야 자기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옛 신앙은 그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생각을 가진 신앙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고 지켜내려는 신앙이 그것이고, 사람의 행위가 육신의 삶의 질과 결과로 나타난다는 가치관을 가진 생각이고 신앙이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 새벽기도회를 잘 가지 않아서, 혹은 기도를 하지 않아서, 혹은 교회에 봉사 직분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옛 신앙의 가치관으로 보면 탐심은 육신으로 재물을 탐하는 것이고, 음란함과 육신의 정욕은 성적인 음란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기를 보는 양에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나 늑대에게는 별미가 되듯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그 눈도 그리스도의 안목과 같고 생각도 그리스도와 같으며 가치관도 그리스도와 같을 수밖에 없다. 음란과 탐심과 육신의 정욕이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안다는 것이다.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평안을 추구함이다. 육신이 바라는 바를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다. 그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삶이 평안하고, 멀리서 기도했더니 그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면 능력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신의 수고를 최소화하면서 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여기는 일들이 많이 이루어지면 좋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그 기본인데, 육신의 수고를 하지 않아도 기적과 같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이 평안해지고, 육신이 속한 세상에서 육신의 삶이 영광을 얻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년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긴다는 썩은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 시험에 합격하면 감사하다고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모든 것이 바로 옛 신앙에 속한 육신의 정욕인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육신의 어떠함을 신앙의 모든 가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 와 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본성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대부분의 교회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또 좋은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옛 신앙>과 그에 속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불기동과 구름기둥이 있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기적인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면 생존이 위협을 받는 것이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동은 생존의 필수 요소였다. 그 필수적인 신호가 이끄는 대로 가는 삶이 광야의 삶이다. 즉 성경에 있는 것을 지키면 육신의 삶이 보전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여정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 성경대로 살아야 그의 행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대변한다. 교회에 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업도 공부도 자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당부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 같아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이 광야의 신앙 곧 옛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어떠함이 곧 하나님 은혜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생각은 육신의 행위가 죄의 척도가 되고 또 복의 척도가 된다. 그래서 탐심이나 간음과 같은 것을 단지 육신의 행위로 보고서 그런 행위가 하나님 앞에 범죄며 그 범죄로 벌을 받아서 세상에서 흉한 일을 당할 것이라 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눈에 보이는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옛 신앙의 행태인 것이다.


그렇게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은 또한 육신의 평안을 복으로 여긴다. 육신의 행위를 선하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식의 생각이 그것이다. 육신이 복을 받고 평안해지는 육신의 욕망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을 복으로 여긴 것이다.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고, 그 욕망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고, 광야의 신앙이며,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며 옛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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