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을 교훈하면서 타락한 천사에 대하여 언급한다. 말 그대로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타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근원적이고 상식적인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고 실수도 없고 빈틈도 없이 경영하시는 그 경영 아래에서 하나님의 경영 밖으로 이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영화 ‘어 퓨 굿맨’이라는 법정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 의문을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평소 자기 명령 아래 부대가 잘 관리되고 있다는 사령관을 법정에 세운 변호사는 그 사령관이 죽은 사병을 건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사병들이 죽은 사병을 코드레드(얼차려)를 시행했다는 것은 사령관의 명령이 무시된 것 아니냐는 논조로 사령관을 흥분하게 해서 자백을 받아내게 된다. 


그렇듯 군인이 자기 부하가 자기 명령을 어길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어기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위치에서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까지 다투고 싸운다는 것을 용납하실까? 아마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관리 소홀이나 피조물들이 그 경영하심을 벗어날 불만거리를 제공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나은 것이 세상에 있어 그것을 도모하신다고 믿는다면 또 모를까?


이 논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타락에 대하여 일관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을 논함에 있어 타락의 주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스스로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다른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타락의 주체의 죄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실수도 없는 경영이라는 말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경이 하나님의 무결점 신으로서의 성품을 설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타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타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나 것이다. 특히나 타락은 천사의 타락에 앞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타락이 사실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듯 타락이라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명제고 사건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타락한 천사를 가두었다는 것도 그렇다. 타락한 천사를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었다는데, 타락한 천사가 그 정체라는 마귀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유혹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가두었는데 그들이 탈옥이라도 했단 말인가? 하나님은 자신이 잡아 가둔 존재들이 탈옥해서 자신에게 대적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능력도 없는 신이라는 말인가? 타락한 천사인 마귀가 우리를 유혹한다는 일반화된 이론이 그렇게 상식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이 유일하시고 절대적이시며 다른 모든 것보다 만족을 주시는 사랑의 신이라고 믿는 신앙을 가졌다면 앞에서 제기한 의문은 아주 상식적인 의문이며, 합리적인 의심이다. 즉 우리가 흔히 아무렇지 않게 마귀는 타락한 천사라고 하는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귀에 대하여 타락에 대하여 앞서 제기한 의문과 결을 같이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은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타락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타락이라는 하나의 명제 같지만 앞선 언급한 것과 같이 이 타락에 대하여 어떤 정의와 안목을 가졌는지는 하나님을 진정한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천사나 사람이 자기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서 타락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무능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고정한 상태에서 묵상해야 한다. 타락이라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관리 소홀이나 하나님의 부족함을 틈탄 반란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설계하셨거나, 예상한 것이라는 수준이 아니라 동전의 앞면 뒤에 뒷면이 있는 것과 같이 창조와 경영에 수반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사람만이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의 본체시고 그 의를 표현하실 형식이자 형상이며 물리적 모양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버금가게 그 창조의 과정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볼 때 사람과 같이 의에 대한 개념과 판단과 안목을 가진 또 하나의 존재로 천사가 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사고와 갈등의 기준이 되며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적 사상이 죄가 되고 반대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적 사고가 또 죄가 되는 것과 같다. 나라로 봐도 그 나라가 택한 ‘의’가 헌법으로 명문화되고 그것에 뿌리를 두고 모든 법과 사회질서가 수립된다. 따라서 나라에서 죄가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 의가 기준인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동물과는 다르게 어떤 것을 선으로 또 어떤 것을 악으로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의로운 존재로서 그 의를 나타낼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천사가 또한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진 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의를 수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아바타처럼 자기 생각 없이 온전히 그것만 할 수 있는 존재로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이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이 움직이기만 하도록 창조된 상태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전혀 의미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최면이나 정신착란 상태에서의 일을 그 사람의 진의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양의 동물들을 보이시고 그 이름을 부여하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 동물의 이름을 정해서 교육시키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아담이 그 안에 있는 의지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정체성에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가치관이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뜻과 같이 이해하고 그 이름을 부여한 것을 기뻐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 밖에 모르고 그것만 나타내는 로봇이나 기계나 아바타나 최면이나 가면 상태의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어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스스로 그것을 선택할 여지를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섭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모습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지은 모습과 존재의 정체성이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적합하고 온전하며 훌륭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치 공장에서 만든 전구가 품질검사에서 합격을 득한 것은 전기를 넣어 조명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와 뜻에 부합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존재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본성으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갈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천사도 성경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인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는 형상 가진 존재로 만드셨고, 그것이 자기 운명이 되면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에 만족스럽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나타나고 그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 창조의 섭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악과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이 자기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스스로 의를 가지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 같고, 사람이 자기 주관으로 옳고 의로운 것을 찾아서 그것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 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를 가지면 그 의에 기인한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선악과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인생을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절대적인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 인생을 자신이 기획하고 선택하였을 때만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이의 목적 아래에서 창조된 것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창조조자의 창조목적에 반하는 것이고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께 죄가 될 뿐 아니라,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 앞에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창조자의 창조목적을 벗어난 피조물이 무엇을 한들 그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는 선택의 의지와 그 표상인 십자가와 성경말씀과 또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 살기에 너무 적합한 육신을 주셨다. 그것이 전지전능하시고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다. 그 안에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도 함께 있는 것이다. 최면 상태에서의 찬양은 어차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타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타락이라는 것은 어차피 본질적 존재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의미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살고 있지 않는 그 모든 것이 바로 타락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리 소홀을 틈탄 반란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 주어진 기회를 탕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이라는 것은 술과 여자와 도박과 범죄에 빠진 것이나, 교회에 다니다가 절에 가거나 무당을 찾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존재인 사람과 또 천사가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자기 인생을 창조목적을 외면한 체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인생들의 삶이 바로 타락인 것이다. 설사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죄가 되고 타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의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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