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기록한 모든 저자들, 구약이든 신약이든 무관하게 일관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 외에는 없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만 정작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성경을 읽고서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은 세상의 어떤 문제와 연관 지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뿐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착해야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부터 행동까지 모두 선해야 한다.’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서 그 부를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까지 많은 조건들을 붙인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마음속에 정말로 도전적인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뜨겁게 든다. 그럴 때 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예수 안에 그것이 없어서 그것을 걱정하느냐?”고 정말로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도무지 성경을 어떻게 보면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세상에서 악한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성경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해서 거룩한 꼴로 가운을 입고서 설교하는 그 설교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이것은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진 이래로 복음이 자기 생명이 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울분이며 뜨거움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한 예레미야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시며 우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싶기도 하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만 알면 그것이 모든 것이고 또한 영생이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적혀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지켜 행하여 육신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귀하게 여기는 삶을 얻고자 하는지, 그러고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니 이것이야 말로 참담한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전하는 서신들 속에는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이 말씀이었다 싶을 정도로 같은 말씀을 구구절절이 해 놓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며 복음에 무엇을 더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에 더하여 도덕성이나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지식이나 세상 가치관이 선하게 여기는 자리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며 바라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 밖에 이유가 없다.


예수가 모든 것이라고 믿는다면 <예수 + something>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세상의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한 것을 알고 있다면 신학이나 창조과학과 같은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으면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 자체로서는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예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선언 앞에 ‘그러면 예수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말로 단 ‘1’도 모르는 어두운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상기시키고 옛 신앙을 상기시키면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고 말씀하는 것이 이것을 이야기 함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더니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하나님께 육신이 가진 문제들, 평안을 추구하는 육신이 바라는 것들, 세상의 가치관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 가서 자식이 시험에 붙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육신이 수고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 병이 낫듯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더 좋은 신앙이라 말하고, 그럴 수 있으면 더 좋은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소비했건만 신앙이 좋으면 육신의 평안이 보장되어 하는 것 같이 목사를 대접하고,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나 스탠드글라스로 수놓은 교회를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며, 교인이 세상의 권력 가진 자리에 오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라고 믿는 신앙이냐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을 값이라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을 것인데 그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신다면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정당을 만들며, 예배 시간 대표기도 때에 거룩하답시며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다스리고 있으니 각성하라고 훈계하고 도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모두 옛 신앙으로 돌아간 것이고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며 씻은 돼지가 더러운 곳에 뒹구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데, 존재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풍요와 다산의 잡신들께나 기도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이 바로 옛 신앙이며, 그 신앙에 기생하는 신학과 신학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꾸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높은 곳에 서서 세상의 가치관이 높다고 하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올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그 소리들이야 말로 정말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며 회 칠한 무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자기 육신이 바라던 것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구하는 그 신앙이 바로 옛 신앙이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며, 그것에 신앙을 의탁한 자들은 소경이며 죽은 자이고, 그들 앞에서 그 더러운 것을 외치는 자들은 가증한 것들인 것이다. 그런 것에서 하루라도 빨리 달아나는 것이 진정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고 성경의 구절구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이심도 알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관이 선하고 성공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선으로 알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졌음에도 그 본성이 이끄시는 대로 종이 되고 육신으로 더 수고하고 종이 되며,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경건한 신앙인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 곧 자기 안에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이 모든 것이 되었기에,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더 편하게 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졌더라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사람들은 옛 신앙으로 가려해도 갈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행여 신앙이 타락할까 염려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옛 신앙에 있는 것이며,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행여 자신에게 뭔가 해로운 일이 생길까, 세상 사람들 앞에 수치스럽게 될까 염려하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옛 신앙인 것이다. 그것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고, 모든 사도들이 경계하는 믿음인 것이다.


복음은 오히려 세상에서 얼마든지 수치 당할 수 있고, 불편할 수 있으며, 수고스러울 수 있다. 때로 다윗과 같은 영화를 누릴 때도 있겠지만 그래야만 좋은 신앙이라 여기지 않는다. 빈곤에도 부유에도 처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 신앙에는 성경을 지키지 않아서 해를 당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살 뿐인 자기 모습이 성경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졌고, 그런 생명을 가졌기에 빈곤에도 부유에도 처할 수 있는 생명을 가졌고, 예수 이외에 무엇을 더하지도 않는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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