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에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어떤 이들이 옛 신앙으로 회귀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와 관련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변화산에서 겪은 일과 범죄한 천사와 발람과 발락 등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말씀들의 공통적인 요소는 신앙의 타락과 변질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말씀들이다. 반면에 변화산 사건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하고도 선언적인 말씀을 하시기 위함인데, 그 두 가지가 같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옛 신앙으로 회귀하는 것은 다분히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행여 약해지고 또 타락한 길로 들어설까 염려한다. 많은 경우 그런 염려를 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과 같은 것인데, 그 말씀은 넘어질 것을 염려해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스스로 섰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을 단계별 성취로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취해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나서 그 생명을 표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취와 성장을 구분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신앙에 대하여 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박사 학위나 목사 안수와 같은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이다.


생명의 세계는 어떤 단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타락이나 옛 신앙으로의 회귀와 무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타락을 염려하고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한다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성취하지 못하고 머무르거나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염려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수능을 염려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옛 신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을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무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벗어났다는 것은 단계를 다 이루거나 성취했거나 졸업한 것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났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 온전하게 나면 이전 것은 다 지나간 것이 되는 것이다. 마치 여자가 결혼하여 엄마가 되면 처녀로서의 모든 것은 이전 것이 되는 것과 같이.


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반면교사처럼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이전 신앙으로 돌아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위함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온전하게 자리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단계로 대변되는 피라미드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으로 대변되는 생명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인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강조를 위함이다. 이 편지는 자신이 이제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서 쓴 편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옛 신앙과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 자들과의 구분(거룩)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로 출애굽의 여정과 같아서 크게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여정이 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세계이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세계로 거듭나는 것이고 물세례의 과정이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온전히 아는 세계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이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도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밝는 모든 땅, 곧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람들의 세계 전부가 자신에게 말씀이 되고 또한 자신이 그들에게 말씀이 되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옛 신앙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말씀이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자기 삶의 신호나 척도가 되는 사람, 곧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하라고 된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것도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지켜야할 것이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서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서 ‘이래야 하는 구나!’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고, 성경을 보고 있고, 화가 나는 것을 참고 있다면 다 옛 신앙인 것이다. 이것을 알면 옛 신앙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모아보면 옛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은 신앙의 모든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은 온전한 생명의 법 아래에 있으므로 생명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과 같이 돌아감이 없겠지만, 성경 말씀을 신호로 삼고, 신앙의 여정을 단계적 성취라는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높은 곳에 오르려다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옛날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있어 홍해와 요단강과 같은 큰 전환이 있다. 그것은 아주 힘든 결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겪은 갈등이나, 가나안 땅을 앞두고 겪은 갈등으로 다시 광야를 맴돌았던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 가나안 곧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나기 까지는 정말로 큰 결정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출애굽의 일과 광야에서의 일을 기억도 하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억지로 옛 본성으로 살아보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잊어버렸고 거듭났기에 이제는 없는 옛 본성을 어디서 찾아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옛 신앙을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의 여정이 광야에 있는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툭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했던 것 같이.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어서 어떤 단계를 성취하고 달성해 가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옛 신앙을 염려하고 경계하며 자기 신앙이 약해질까 염려하므로 더 열심히 행함으로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겠지만, 어이없게도 그런 노력이 바로 옛 신앙의 모습인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그 신앙에는 그리스도의 본성, 곧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돌아감이 없다. 대학에 들어간 이들에게 다시 돌잔치는 없는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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