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2:1-22) 옛 신앙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Date : 2018. 12. 21. 09:51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옛 사람과 옛 신앙과 같은 것으로 특정된 신앙을 말씀하시기도 한다. 옛 것과 새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 사이에 어떤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을 기점으로 이전 것을 옛 것, 이후의 것을 새 것 혹은 현재의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구분한다면 그 사이에는 분명히 기준이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는 큰 구분이 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큰물을 건넌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강이라는 두 번의 큰물을 건넜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도 그 신앙에 있어 큰물을 건너듯 그 신앙의 여정에 큰 마디가 적어도 두 개는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을 기준으로 간략하게 본다면 애굽 곧 세상의 종살이 하는 시절이 있고, 광야와 율법의 신앙생활이 있고, 가나안과 같은 복음의 삶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 그 정의가 맘대로 해석되는 것은 광야의 단계이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의 신앙이 광야의 단계인데, 단지 자기들의 육신이 예수님 오신 이후의 시대라는 것 그 하나 만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큰 오해이다.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이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이 율법적이지 않고 복음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에 가서, 목사들에게 또 나름 신앙이 좋다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대부분 “~해도 될까요?”거나 아니면 “~게 되려면 무엇을 할까요?”라는 것이라는 점을 안다면 또 그것이 광야시대의 불기둥과 구름기둥과 같이 신앙의 가고서는 것에 대한 신호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는지 모르겠다.


신앙의 지표와 깨달음은 언제나 자기 안에서 나와야 한다. 생수가 넘쳐나듯이 말이다. 안에서 나오려면 뭔가가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들어간 것이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나온다. 먹은 것이 사람의 몸과 하나가 되어 에너지가 되는 것과 같고, 공부하여 습득한 것이 있어야 말이나 글 혹은 삶으로 나오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자기 신앙의 어떠함이나, 신앙의 증거나, 행위의 결정에 대한 근거가 항상 자기 밖에 있어서 육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좇는 것이나 목사나 신앙이 좋다고 여기는(그 기준도 자기 안에 있다.) 사람의 말과 글에서 찾는 것과 같은 것은 자기 안에 들어가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된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이 일어나면 진행하듯 그저 신호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쳤지만 세례요한의 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신호)>라고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이라고 한 것이 또한 그것을 설명한다. 성경을 보고서 ‘이렇게 행동해야 하나? 아니면 저렇게 행동해야 하나?’고민하거나 연구하거나 혹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학위와 목사라는 자격을 취득한 사람에게 그 결정을 의지하는 모든 것은 다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지 자기 안에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자기 것이 되지 못한 증거이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신앙은 아직 광야의 신앙이고, 복음의 세계에서 보면 분명히 <옛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 베드로후서를 보면서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경계하는 옛 신앙이 육신으로 거짓을 행하고 간음하며 호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이 옛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것을 돌이킬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신앙을 보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사업이나 건강을 지켜 주신다.”고 생각한다. 운전대를 잡고서 기도하고, 뭔가 중요한 일(그 결과가 육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과 같은)에 임할 때 기도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자녀에게 또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행위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율법 신앙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옛 신앙이다.


그런데 단지 자신들이 예수님 이후의 AD(주후, 기원 후) 시대를 살고 있다고 또 신약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행위로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옛 신앙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이라는 것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것이며, 간음이나 호색이라는 것이 육신으로 짝이 아닌 상대와 상간하는 것이나 동성애를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의 의와 세상의 의를 인생의 내용을 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수차례 언급하였다.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인데 그렇게 보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을 자기 행위의 기준으로 보고서 그것을 지켜 행하려고 하는 가치관 때문이다. 성경도 형식만 보고, 자기의 삶도 육신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 만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가 성경의 본질이 아니고, 인생도 육신의 어떠함이 본질이 아님에도 그렇게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보니 모든 것을 형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거짓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뜻과 다른 것을 참으로 아는 것에서 비롯되어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간음 또한 하나님과 짝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형식이고 현상임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용과 본질을 보지 못하니 소경이라고 하고, 보지 못하니 자기 안에 들어가서 생명이 되지 못하니 그 생명의 본성이 자아내는 행위가 없으니 죽은 것이고 죽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옛 신앙은 예수님 이전에 기록된 성경이나 율법이나 구약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모든 것, 성경이 말씀하시는 내용과 의와 행간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알고 행위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모든 것이 옛 신앙인 것이다. 지키려는 성경이 신약이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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