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신의 삶 중에서 변화산에서의 사건을 마지막 순간에 아주 비중 있게 성도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전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은 많지만,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는 변화산 사건에 이어서 예언에 대하여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변화산에서 들은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신 그 말씀이 곧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어서 사사로이 예언을 풀이하는 것을 경계하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사롭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말한 사람의 의도와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기독교 안에서 성경을 사사로이 풀이한다는 것을 신학적 배경 없이 해석하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신학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사사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말씀을 주실 때에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것으로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심도 그것이다.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말씀을 학문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공교히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알게 되는 것 그 하나의 법외에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법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가 없다.


따라서 공부해야 알 수 있다거나, 공부하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거나, 신학 없이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식의 모든 주장들, 그것이 오히려 사사로운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뜻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사로울 뿐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무시하는 처사에 불과하다. 성령이 임하시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성경으로 주신 하나님의 의가 신학이라는 허울 없이 알 수 없는 것이라 말하며, 오히려 신학이 없으면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진정한 사사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에 대한 사사로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언을 주신 이의 정체성에 반하여 해석하는 것, 예언을 주신 이의 뜻과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 없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예언을 사사로이 풀고 해석하는 것이지, 신학이나 종교적 신분에 따르지 않고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 말씀이 자기 안에 확신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모든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신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심과 연관된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심령 안에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생각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기본적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듯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생수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말씀을 내어 놓을 수 있다고 하심과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 곧 예언을 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인 것을 알고 해석할 수 있는 것 역시 성령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의와 뜻과 창조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 모습에서 자신의 삶의 운명과 삶의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육신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 육신으로 수고하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게 하는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것도 성령의 일이신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삶을 주신 목적에 기인한 것이다. 사사롭다는 것은 당연히 그 목적과 달리 성경을 또한 예언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과 목적과 의를 알지 못한다면, 인생이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성령이 자기 안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성경을 또한 예언을 사사로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삶을 주신 목적과 의를 벗어난 관점으로 성경을 대하는 모든 관점과 이론과 학문과 신학과 가치관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성령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나 가치관을 접목한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의 일을 의탁하고, 육신의 일의 결과나 성과나 어떠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등의 판단을 하거나, 그 결과가 육신이 바라는 평안을 목적으로 하는 방향에서 성경을 보고 가르치고 해석하는 모든 것이 또한 사사로운 것이고 성령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육신에게 일어날 어떤 세상의 일을 먼저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면 그 삶이 어떤 삶이 될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명이 나면 강아지가 태어나면 개로 살 것을 아는 것과 같이 그 생명의 본성을 알기에 그 생명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된 삶의 어떠함을 이야기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언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성령 없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생명 없이 그 말씀을 논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듯 자기 안에서 그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신학처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역사가 자기 삶의 운명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라는 것에 순종한 사람은 단지 그것 하나에 순종했을 뿐인데,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놀라운 불가분성,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운명이라고 인정하는 그 하나만 했을 뿐인데, 남자로 나서 남자의 삶을 이해하듯, 여자로 나서 여자의 삶을 이해하듯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삶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들을 대하여 가면 갈수록 자기 안에서 그 이치가 밝아지는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맛 본 사람은. 아니 그 사람들만이 이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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