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2:1-22) 거짓된 옛 신앙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Date : 2018. 12. 18. 08:11 Writer : 김홍덕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 그리고 정의들은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나 정의와는 다른 것이다. 사사롭다는 것이 사람들 중에 일부가 개별적인 의견을 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안목으로 보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짓되다는 것 역시 같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은 사실(fact)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말하는 것, 그것이 거짓말이고 그것이 거짓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분명한 사실이고 진리인데 그것과 다르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논의하며 심지어 학문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는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간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간음이라는 것은 자기 짝이 아닌 상대와 관계하는 것인데, 결혼한 사람에게 짝은 자기 배우자인 것과 같이 사람이라는 존재도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라는 짝이 있는데 그것과 다른 것을 짝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하라고 주신 육신인데 오히려 그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다 간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마치 복선과 같이 깔린 성경 속의 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를 알지 못하면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행간을 읽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이 그 안에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고 죽은 것은 판단하시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만드신 창조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의 호흡을 주시고 삶을 주신 것은 어디까지나 창조의 뜻이 나타난 것이지 그것이 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생명과 같이 있고, 또한 그 생명이 본성으로 나타나는 삶이 있느냐 아니냐가 바로 생명이 있는지 죽은 것인지의 기준인 것이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 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그러면 그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 인생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과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하나님은 내용이고 그 사람의 삶은 형식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 간음이 아닌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간음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니기에 사람의 짝이 아닌 이유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 우리에게 인생으로 살게 하신 뜻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은 성경을 보면 그 뜻이 온전하게 깨달아 진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학문이 아니다. 신학이나 사도들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씀한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다. 그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 능력만 있으면 된다. 단지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의 운명이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에 순종되고 아멘 된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한 사람 안에 들어오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이유라는 것으로 순종되면 성령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신 사람이 바로 성령으로 예언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다. 성경을 보는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돋보기나 안경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본성이 그것을 온전한 하나님의 의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푸른 풀이 양에게는 양식으로 늑대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듯, 자기 안에 어떤 본성과 생명이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과 성경은 다르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사사롭게 예언을 푼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하나를 하나님의 생명 아닌 것을 자기 짝으로 하여 그것을 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육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일도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푸른 풀을 보는 양과 늑대가 다르게 보는 것처럼.


그렇듯 하나님이 주신 그 뜻과 다른 가치관과 연합하여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자기 가치관을 형성한 것이 간음이고 거짓인 것이다. 그것이 또한 호색하는 것이고 탐심인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또 성경의 말씀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살면 인생이 순탄할 것이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대로 성경대로 산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순탄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을 산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를 그렇게 믿고 있다.


바로 그런 신앙이 거짓된 것이며 옛 신앙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하나님이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의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로 옷을 입었다고 했는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가진 신앙과 믿음 그것이 옛 신앙이고, 옛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여기며, 그 온전하지 못함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곧 율법으로 그것을 가리는 신앙이다.


율법적인 신앙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옛 신앙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생명으로 있는 거듭난 상태가 아닌 상태로 성경을 보고, 그 가치관대로 읽은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그것이 바로 옛 신앙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것이기에 또한 거짓된 것이고, 사람이 짝하여야 할 것이 아니기에 간음하고 호색한 것이다.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의 유전자가,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고 그 생명이 가진 안목과 가치관으로 예언과 성경을 보는 것이다. 반면에 먼저 자기가 정한 목표,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보는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서 성경을 보고, 웬만해선 평안하지 않은 육신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부끄럽고 부족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만회하여 목적하는 육신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지켜내려고 보는 그 관점이 사사로운 것이고, 그 사사로운 관점에 의거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 곧 옛 신앙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탐심인 것이다. 성경은 그런 용도나 목적이 아닌데 자기 이익과 자기 목적을 위하여 성경을 지키는 것으로 여기고 간주하려는 그것이 바로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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