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런 것을 좋은 말로 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얼핏 좋은 모습인 것 같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애쓰고 있다면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이 아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분명히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신앙이 아직 애쓰고 있고, 행여 약해질까 염려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도 그렇다. 굳건하고 실족치 않으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에 넉넉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즉 자기 안에 그 확신이 없다면 자기 신앙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심이다.


굳건함과 실족치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행여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그것을 부인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히 부족한 상태이다. 그 믿음은 굳건하지도 않고 늘 실족하거나 그럴 위험에 처해 있으며, 행여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하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여러 증거가 있겠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어떤 것을 만약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거나 삶이 곤고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굳건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회를 가면서 빠지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예배에 빠지거나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증거이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것도 넉넉하게 들어가려면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들 별 소용이 없다. 나라의 영원함과 무관하게 자신은 유한하니 그 유한함이 한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 관심이 있다. 천국이 영원하거나 말거나 먼저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인가? 이는 성경에서 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의 삶은 유한하다. 유한할 뿐 아니라 별로 길지도 않다. 그럼에도 성경이 영원을 말씀하신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이 육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또한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영원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라 생각하고, 성경을 지키는 것은 육신으로 지키려 하는 것은 어이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영원함을 비롯한 당신의 성품을 우리 인생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면 그 영원함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지금 베드로 사도도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앞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을 언급하였다. 그 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면 그것이 바로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원한 존재라는 의미이고, 그 영원함 곧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는 것, 또한 동일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은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순종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존재가 영원한 존재라면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도 또 그 영원함을 누리는 것도 넉넉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행여 약해질까 염려하여 노력하고 있거나 인생은 연약하니 어떻게든 노력할 뿐이라는 신앙을 가지고서 죽어서나 천국에 들어가 보겠다고 힘쓰고 있는 것으로는 영원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애쓰는 것은 죽어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겠고 이 블로그 다른 글에서 몇 번 언급한 것과 같이 영원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는 형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내용 곧 목적과 의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의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영원함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농부가 알곡을 창고에 들이듯 영원한 존재로서 육신의 장막을 벗은 이는 자연스럽게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치 떨어진 물방울이 물과 하나가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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