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내용적으로 볼 때 불특정 다수인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다. 그들에게 부르심과 택하심을 언급한다는 것은 같은 믿음으로 동의가 되는 부르심이고 택하심이라는 것이다. 부르심은 앞선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와 목적이 사람을 향한 부르심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택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그것을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베드로 사도가 9절에서 소경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소경이라 언급한 사람은 1장 11절까지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정확히는 그것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지 못한 사람이고, 믿음에서 사랑까지의 덕목을 노력하여 이루어내려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옛 죄라는 것도 그렇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진 가장 원초적인 죄는 선악과인데, 그 선악과는 육신을 가진 사람과 그 인생을 보는 관점이 핵심이고, 그 핵심 중에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정하게 보는 상태인 선악과를 먹은 죄의 상태가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옛 죄라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에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육신 가진 인생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거하여 부족한 부분을 행함으로 이루어내려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열매가 아닌 노력과 공로로 믿음에서 사랑까지를 이루어내는 소경과 같은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옛 죄이고, 옛 죄의 본성을 인한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나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에게는 진정한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살아가는 자기 모습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굳건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았는데, 기독교인이기에, 예수 믿기에 그에 맞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이라는 부르심에 순종한 것 그 하나뿐인데 자기 안에 이전에 없든 믿음이 있어 하나님을 부인하려 해도 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뜻을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 알지 못하는 의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수고하는 것을 드리는 모습이 나오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될 때 가지게 되는 그 확신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 하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날 것’이라고 하신 것이나, 또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들은 다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노력하지 않고 신념을 가지지 않았는데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을 성경대로 살게 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진정으로 굳건한 믿음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의 세계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사람 사는 세계의 어떤 것으로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자전거 탈 수 있는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전거 타는 법을 상실하게 만들 수는 없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된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이 권면은 이제 순교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인지한 베드로 사도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는 편지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세계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계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증거, 구원의 증거를 눈에 보이는 것에서 찾으려 한다. 세례증서에서, 때론 방언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 것에서, 또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너 구원 받았다.’고 증언하는 것에서 증거와 확신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들은 늘 그것이 행여 훼손될까 하여 계속 기도하고 묵상하여 지키려 한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신앙을 지키려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실족할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유전자가 사람이 아닐까 염려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렇듯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진정으로 거듭나서 자기 안에 있는 그 본성대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족할까 염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굳게 선 믿음이고 진정으로 실족치 않는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은 지속적으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성품이 유전자의 본성과 같이 자기 삶을 이끌고 가고 그것에 순종했을 뿐인데 나타난 일을 보니 그것이 믿음이고 절제고 인내며 사랑인 것을 알게 되는 믿음인 것이다. 그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고 실족치 않는 것이다. 그 부르심이 우리 존재의 의미이고 그 의미가 하나님이 생명이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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