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이라는 것은 조용하고 신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또 신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의 경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나 사람들은 경건이라는 것은 행동 양식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어떤 행동, 어떤 언행이 경건한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건한 예배라고 하면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요제의 경우 제사장이 제물을 들고서 요란하게 흔드는 것이었다는 것만 알아도 경건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점은 단지 경건에 대한 시각 교정을 목표로 하거나, 조용하고 엄숙한 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니 버리자는 의도가 아니다. 왜 사람들이 경건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신앙을 형식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엄숙하고 조용한 모습을 갖추어야 경건하게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기에 군복을 입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그 의가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경건이고, 일반적으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회개하고 예배에 임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경건의 단면들은 그 경건한 삶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건이라 여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요제처럼 요란한 경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경건한 모습인가를 생각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이셨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다. 성전에서 상을 뒤집은 예수님이 경건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성전에서 상을 뒤집은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말씀, 입으로 하신 말씀이나 육신으로 보이신 모든 말씀의 궁극은 결국 십자가이니 경건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숙하고 조용하며 신사적인 것이 경건이 아니라,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삶을 사는 그 삶이 바로 경건인 것이다.


바로 그런 경건이 있어야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결국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정체성을 부여하셨다는 것과,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우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것을 본 사람이 그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졌기에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우리 삶에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려고 의인이심에도 죄인과 같이 자신을 드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시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진 경건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에 사랑이 더해진다는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단순히 고통이라고만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 것을 인하여 따르는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요일에 출근하라는 요구를 받고서 갈등하는 것, 눈치 보는 것과 같은 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요구를 단칼에 뿌리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도 하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의로움을 인하여 나의 육신이 한 번 더 수고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궁극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했더니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이미지와 다르다는 이유로 죄인을 삼아 처형한 사건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진 의로움을 인하여 육신을 드리는데 그 명분과 드림이 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33살 총각이 진짜로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나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편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온전한 의를 가지고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어두운 의를 주장하므로 인하여 육신이 한 번 더 수고해야 하는 그 수고에 자기 육신을 소비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또한 경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의 도가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의를 주장하지 남의 의로움을 인하여 자기의 육신을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의가 자신의 육신을 남들이 옳다는 주장으로 끌고 가는 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본성이 이끄는 삶이 바로 경건이고, 그 경건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형제가 할 일을 한 번 더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형제 우애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건으로 살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아들을 발견했듯이 경건으로 살아가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과 삶은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 마음에 자신도 그렇게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다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기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의미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본성으로 알아 살아가는 하나님 아들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에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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