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앞서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떤 단계적 성취가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능력이 자람과 같이 하나의 생명에서 나타나는 징후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는 다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것,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된 본성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의 모든 이유와 의미와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심령의 본질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칭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 안에서 본성이 되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살게 되는 그 온전한 변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것,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을 공급하는 것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은 그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고 자라면서 나타나는 생명의 징후요 생명의 표현이고 역량이며 능력인 것이다. 믿음에서 사랑까지의 모든 것은 한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까지 그렇게 노력하자고 설교를 들어 왔다. 그것은 설교하는 자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식이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육신으로 수행하듯 익힌 지식에 기인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믿음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님이 객관적으로 실존했다는 것을 믿으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내에 경건을 더하는 것은 경건이란 것을 인내에 더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거기에 무엇을 더할 여력이 있는 인생이 몇이나 있겠는가? 더욱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으니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인내도, 아니 그 보다 절제도, 또 지식을 더하는 것도 힘든 지경일 텐데 거기에 또 무엇을 더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 앞에 것도 수시로 지키지 못하는데.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인내에 경건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가 경건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으로 거듭나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의 인내는 곧 경건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라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해 온 절제와 인내를 비롯하여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모든 덕목은 모두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라는 것이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씩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억지로 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절제와 인내는 언뜻 엄청난 견딤이 요구되는 것이고 수도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삶인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떤 이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절제와 인내하는 모습 같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정체성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순순히 순종하심도 그것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경건이다. 경건이라는 것은 조용히 하고 차분하고 거룩한 목소리로 말하고, 신사적이며 도덕적인 봉사를 하는 삶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흔히들 예수님의 삶을 너무 경건하게 여겨 교회 학교 학생들이 예수님이 화장실은 가셨는가 물어볼 정도지만 사실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불한당에 가까운 모습일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경건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건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살아가는 삶은 남들이 볼 때 억지로, 또 신앙으로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삶이 자연스럽게 순종되는 삶이다. 억지로 절제하지 않고 신념으로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 하나님을 알기에 순종하게 된 그 본성대로 살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듭난 생명이기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적인 것이다. 그 본성을 인하여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경건의 삶이다.


그러므로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더하는 것은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고, ‘경건해야지!’라고 작심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 경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본성이 절제하게도 하고 인내하게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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