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동일한 믿음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큰 약속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말씀한 약속을 받은 믿음을 생각나게 한다.) 약속이 있는 믿음, 약속을 받고 믿는다는 것은 그 약속이 자기를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약속이 바로 자기 자신의 일이라는 의미이다.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약속 역시 그렇다. 약속을 믿는 사람은 약속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 보다, 그 약속의 주체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약속은 결국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인데,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약속을 믿는 사람 자신이 신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자신의 의가 되는 것 보다 귀하거나 큰 것은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고 믿는다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배는 하나님과 의가 같아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약속은 어떤 이행을 수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려면 자신도 뭔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헌금을 하고, 봉사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을 선하게 하고, 속에는 화가 나지만 참아야 한다며 참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런 약속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이 약속의 성취는 자기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돈을 더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한 사람에게 어떤 것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그 약속의 대상이고 성취의 결과라는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은 훈장과 같이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신의 성품을 가진다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 사도의 편지로만 본다면 베드로 사도가 문안하는 그 대상들, 곧 그리스도의 의를 동일한 믿음으로 가진 사람들은 이미 그 약속이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사람이 곧 그리스도고, 그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가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가졌다는 것과 신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다만 베드로 사도는 그런 성도들이 가진 믿음과 신의 성품을 가지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을 인함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약속의 이행을 위하여 하나님께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그 하나를 인함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 곧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 순종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도 그렇다. 우리가 그 부르신 자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부르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부르심은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며,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모습이기에 육신을 가진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부르신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운명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생으로 창조하시고 삶을 살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이 바로 신의 성품 곧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듯이.


또한 이러한 약속은 썩어질 정욕을 피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별개의 옵션이 아니라 같은 맥락이다. 정욕이란 육신이 추구하는 바를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욕이 단지 성적인 욕망이나, 돈에 대한 욕망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주체가 되려는 모든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육신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육신을 평안하게 하고, 육신이 속한 세계 흔히들 세상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가치를 부여한 것을 육신이 이루고 누리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이 좀 평안해지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 여기고, 육신이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성공이나 높이 오르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육신이 평안하면 할수록 더 신앙생활하기 좋다고 여기며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나, 육신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욥의 세 친구와 같이 교회에 가야한다거나 하나님 앞에 어떤 행실이 잘못되었는지 돌아 봐야 한다거나, 예수 믿어야 해결 된다는 식의 생각과 같은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썩어질 정욕에 관한 것이다.


왜 그것이 정욕인가 하면 그것은 육신은 하나님이 주신 소비재인데, 반대로 그 육신이 소비되지 않고, 피곤하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은혜요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육신이 소비재가 아니라 육신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참혹한 것일 뿐이다. 육신이 죄인이 되어 처형당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신들이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본질적인 말씀을 육신의 행함과 결부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행위로 지은 죄를 사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이탈한 삶을 사는 것에서의 회복을 위하심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독립된 행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결과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행위로 지은 죄를 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기에 육신의 정욕으로 십자가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창조 때에 정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다. 세상 지으신 하나님과 같은 의를 가지는 것 이상의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귀한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임을 순종하는 사람, 육신을 본질로 보지 않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인 것이다. 자기 힘으로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으로 되는 약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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