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에 절제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 신학이나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면 그 말씀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학이나 성경공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알고자 했다면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았을 것이고, 그 말씀을 믿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진심으로 인정했다면 그 말씀 앞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성령으로 인하여 알게 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어야 적어도 양심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연코 머리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체휼되었기에 부인하려 해도 아는 것이요, 인지하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더 나아가서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수의 강이 네 속에서 넘쳐날 것이라고 하심이나, 성령이 오시면 모든 알게 하신다는 것이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을 아는 것이라고 하심과 같은 말씀들이 모두 다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을 알면 자기 안에 영생이 있다는 것까지 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 곧 안다는 것이 절제를 가져올 수 있다. 절제는 신념을 가지고 참는 것에서 시작할지 모르지만 온전한 절제는 그것 자체에 관심이 없어지는 세계이다. 예를 들면 초식동물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절제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게 완전한 절제이다. 하나님을 알면 우리가 교회에서 절제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들이 하나씩 자기 삶에서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절제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절제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을 아는 것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절제라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을 보면서 참으려고 애를 쓰거니, 자기관리 교육 같은 것을 도입하여 절제하려는 것은 절제도 아닐뿐더러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절제에 인내를


그렇게 되면 인내도 물 건너 간 것이다. 인내는 참고 있는 과정까지에 대한 말이 아니다. 참아낸 결과까지가 인내인 것이다. 성경을 지키는 삶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어느 날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어차피 어긴 사람이 되는 것처럼(그래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이 율법 신앙인 것이다.) 인내도 인내하려 애쓴 것으로는 인내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참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셨으면 될 일이지, 고통을 느끼게 해 놓고서 그것을 참아내면 인내한 것이라고 은혜를 주신다면 하나님은 아주 고약한 신이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더 처참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랬다면 하나님은 온전하지도 않다. 만든 사람이 미완인데 보기에 좋다고 하신 분이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내는 어떤 면에서는 이중적일 수 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참는 것 같지만 정작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본성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이 참는 것으로 또는 견딘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사람이 보면 그 고통은 견디고 참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가져다주는 본성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많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내라는 것도 절제와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있어야 한다. 참으려고, 견디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성이라서 어쩔 수 없기에 남들이 볼 때 견디는 것으로 보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인내인 것이다.



절제와 인내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나님을 아는데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은 모른다? 이럴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데 하나님을 모른다?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부나 지엽적인 것인 것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기 존재의 전부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것에 대하여 절제할 수밖에 없다. 가치관이 이미 돌아섰는데, 위로 올라가는 것을 선으로 영광으로 복으로 여기던 삶에서 뒤돌아서서 낮아지고 자기 육신을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인생들 앞에서 죄인과 같이 수고하는 것에 내어주는 방향으로 돌아선 사람인데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절제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라는 말의 뜻이 ‘가던 길을 돌아서다.’라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다.


절제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라고 주신 육신을 오히려 영화롭고 평안하게 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육신이 그렇게 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을 흠모하는 마음을 참는 것이 절제다. 사람들은 오히려 절제되지 않는 것을 복으로 여기면서 겉으로는 그것을 참는 것이 속물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무덤에 회칠하듯 치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기에 육신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선으로 복으로 여기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이 한편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속물이라 포장할 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생명이 자라면서 관심을 두었던 것이 하나씩 자라져 가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알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절제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절제된 삶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참고 견디는 고통이 있는 삶과 같이 보인다. 물론 축구를 좋아한다고 뛰어 다닐 때 숨차지 않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힘들고 고된 면이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특급 호텔의 서비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억지로 절제하지 않지만 절제하는 것이 가진 느낌은 그대로이다. 다만 본성이 그럴 뿐이다.


인내 또한 그렇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이기신 것은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본성을 거스르고서야 그 생명의 정체성과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자가 고기를 안 먹는다면 사자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 십자가의 본질인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의 의 앞에 육신으로 수고하는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인내도 다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인내도 절제도 하나님을 알면 어쩔 수없이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명으로 시작해서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리어 절제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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