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들은 바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믿음과는 별개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예수님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그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이 일으키시고 보이신 기적들이 객관적으로 사실이며, 그 시절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헌금 받아서 설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늘 바란다. 병이 낫거나, 남다른 성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초인적, 초자연적 현상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 위해 노력한다. 심지어 창조과학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객관적으로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보들이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밑에서 조롱하던 이들이 바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적을 바라는 믿음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던 사람과 같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능력이라고 말하고 요구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보이라고 시험한 마귀와 같은 존재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그런 능력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잔돈과 같은 것이다. 그게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능력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시기 위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보이실 수 있고, 또 반대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보이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시면 언제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냥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을 예수님의 절대적 권능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 중에서 잔재주로 보는 것, 그 어느 것이 예수님의 능력을 더 인정하는 것이겠는가? 따라서 그런 기적들, 지금도 찬양하고 흠모하는 그런 기적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비한 능력의 아주 작은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목도한 것으로 본다면 베드로 사도만큼 많이 본 사람이 있겠는가? 자기 장모도 예수님께서 고치셨는데. 그런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그런 기적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고, 흠모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의 모든 것을 주시는 것,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능력, 그 능력이 신기한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능력이고 신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병을 고쳐서 기도원 차리고, 교인들이 하나님을 뜻을 알고자 하면 기도해서 답변해주는 무당짓거리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이라고 그 많은 기적을 목도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생명과 경건은 어떤 것인가? 이 육신의 생명 그것인가? 또 예배시간에 떠들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것이 경건인가? 그것이 아니다. 생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는 것이고, 경건은 육신의 행위가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요제를 생각해보라. 소 뒷다리를 들고 춤추듯 흔들면서 드린 제사가 요제인데, 하나님 앞에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예배드리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건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명사들의 정의에 있어 사람들은 일반적인 세상의 각도에서 본다. 생명이라고 하면 생물학이나 의학에서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건이라고 하면 조용하고 조심스러우며 정성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능력이라고 하면 성공하는 역량이나 기적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단어와 명제들의 정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능력이라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능력이며, 경건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삶의 습관과 태도와 모양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조차 그렇게 생각지 못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과 안목으로 생명이나 능력이나 경건을 보는 것, 그런 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이며,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았다고 여길 수 있는 그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뜻하신 바가 나타나면 살아 있는 것이다. 시계가 시각을 바로 알려주면 살아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능력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이루어내는 그것이 능력이며, 경건은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어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경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다.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이 서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관점과 안목과 목적과 의와 가치관을 가진, 한 마디로 하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지지 않고서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약속한 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본성과 생명과 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예수님과 같은 것을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도 누구를 부른다는 것은 같은 것을 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다. 하다못해 싸움이라도 그렇다. 같이 싸우자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와 같은 생명을, 또한 그 생명에서 비롯된 삶, 곧 경건의 모든 것을 주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능력이고, 부르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성품의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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