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큰 관점은 결국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과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육신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생이 가진 자신의 가치관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을 보존하려고 하고, 육신의 평안이 곧 성공이고 영광이라고 여기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은 이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형식과 도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을 하나님 도구로 본다고 하면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한낱 도구에 불과하다고?’라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바보 멍청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나은 존재라면 몰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형식으로 여기신다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그릇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즉 인생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존엄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존재 목적을 벗어난 자리에서 존엄한 것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남녀의 사랑이 고귀하다고 해도 그것이 불륜이라면 존엄성은커녕 오히려 비난을 받는 것이듯, 인간 존엄성 역시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안에 있을 때 존엄한 것입니다. 자동차가 이동이란 목적을 상실하면 제조사나 브랜드가 뭐든 고철이고, 겉모양이 아무리 양호해도 고철일 뿐인 것과 같습니다.


더욱이 사람이 사는 세상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더 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없고, 그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나가 되시는 것을 인간 존엄성의 최고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생이 하나님의 도구요 그릇이라는 말에 ‘도구’라는 말에 매몰되어 그것이 마치 인간 존엄성을 훼손한 것처럼 여기는 생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 육신에 대한 가치관이 어떠한지에 따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의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난이라는 것은 쉽게 육신이 겪는 곤고함과 고통 그리고 힘듦이고 그 개념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고난이 육신을 가진 이유라고 여기는 것과 욥의 세 친구와 같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도 있고 하니 자신들은 고난을 달게 받으려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몸이 고난을 받는다고 다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가가 있는 고난이 있고, 자기 본성이 그 고난을 순종할 수밖에 없기에 받는 고난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고난은 대부분 대가 혹은 사람이 그 고난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을 어떤 상급을 받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시험이나 테스트로 생각하는 것이 있고, 더 심각한 것은 살면서 곤고한 일을 당하면 교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욥의 세 친구와 같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고난이란 우리 육신의 어떤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뎌내야 상급이 있다는 것이나, 뭔가 범죄 한 것이 있으니 고난을 당한다고 여긴다는 것은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본성에 의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을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신념을 가지고 참고서 십자가를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로 앞서 이야기 한 고난을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고난은 값을 지불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목적을 가진 사람의 본성 때문입니다. 마치 연어가 죽을 줄 알면서 알래스카로 돌아가듯 본성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고난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살면서 바라는 것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은데 몸이 자꾸 아픈 것이나, 평안하게 살고 싶은데 선교하기 위해서 오지에 가서 고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렇듯 잘못 알고 있으니 자기 육신의 소망을 억지로 누르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착각하면서 절제하고 수절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 어디를 봐도 그런 고난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평안을 바라셨는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자신도 육신으로 평안이 먹고 살고 싶은데 예수를 믿고 전하려 하다 보니 그러지 못하는 자기 삶을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웃기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삶이 육신으로 평안함을 바라신 삶이 아니었기에 그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남들 같이 인생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을 고난이다,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웃기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거듭난 생명으로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듯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가득하고 생수가 넘치듯 하나님의 의로움이 넘쳐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가르치려 들거나 심판다거나 성직자처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본이 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고난입니다.


따라서 이 고난을 받는 사람은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난 것인데, 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니 그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 안에 있으니 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로 하셨고, 그 육신으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의로우나 의롭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죄인이 돼서 육신의 수고를 드림으로 본이 되어 의롭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게 되어 생명을 얻게 하시고자 함을 목적으로 삼으셨는데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니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상황에 따라서는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는 것과 같은 희생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 일상에 늘 널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 하나하나를 규범으로 여기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지키려면 그런 본성을 가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거듭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 그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본성으로 살아가니 그 생명으로 사는 한은 ‘항상’, ‘쉬지 말고’, ‘범사’와 같은 말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 행위의 모습이나 결과로는 지켜내지 못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때가 많지만, 그러나 그렇게 지켜내지 못한 결과조차 생명의 법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으로 태어나서 하나씩 사람으로서의 삶을 배워가고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 내 생명이 장성하지 못했구나!’라고 느끼는 것과, ‘하나님의 법을 어겼구나!’라고 느끼는 것은 본성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 고난은 의외로 일상적인 것입니다. 치약 옆구리를 짜는 가족에게 잔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볼 때마다 밑에서부터 눌러 놓는 것이 육신의 수고로 종이 되는 것이고, 편리를 위하여 차로를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가서 유턴해서 오는 것과 같은 것이며, 청소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을 움직여 청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치약 옆구리를 짜서 사용하는 것이 더 편리하기에 육신의 평안을 좇는 의로움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고, 육신이 좀 편하자고 남들의 짜증은 고려하지 않고 끼어드는 것입니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청소의 세계에서 더 의로운 것이나 그 의로움을 알지 못하고 더럽히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고 청소하는 것이 바로 육신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육신을 소비하는데 성경이 시켜서, 교회가 시켜서, 그렇게 해야 복을 받으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것을 시켜서 하는 것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에 죄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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