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1-6) 음란과 술 취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5. 17. 07:49 Writer : 김홍덕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함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 이러한 것은 신앙 안에서 터부시되는 것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것들을 법 없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 앞에서 거저 음란하지 않고 정욕과 술 취함을 멀리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방인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씀을 버젓이 보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방인의 생각이 본질이고 음란과 정욕은 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육신의 행동과 삶으로 표현된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듯, 음란과 술 취함도 역시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행위 자체가 본질이거나, 행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행동을 이끌어 내는 생각과 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이 없는 이방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위가 굳이 음란하지 않아도 이방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지나간 때로 족한 방탕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대로 방탕한 삶을 그치려면 단순하게 음란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는다고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은 자신이 ‘이제 음란한 생각을 말아야지!’라고 각오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이 언제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음란과 방탕함의 근원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거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나, 삶의 순간순간에 이겨낼 수는 있어도 항상, 범사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방탕함을 그치는 것도 생명의 법에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라는 것 역시 생명의 법입니다. 이 법을 아는 것과 아닌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법한 이방인의 뜻>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법> 역시 당연히 생명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법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방인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음란하고 방탕하며 술에 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이끌어내는 심령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생명의 법을 안다면 음란도 방탕함도 우상 숭배도 하지 않지만, 생명의 법을 모르는 것 곧 성경의 모든 말씀을 생명의 법으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보고서 지키려고 하면 언제나 음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늘 실패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가진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 어두움에 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 곧 육신의 정욕을 인함이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한 것에 신앙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란과 방탕하지 않는 삶을 설사 산다고 해도 생명의 법을 모른다면 어차피 이방인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알듯이 인생이 음란한 생각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기에 모든 인생이 이것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생명의 법을 아는 것입니다. 무법한 존재가 아니라 법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즉 성경을 생명의 법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은 사실 단순합니다. 생명은 그 생명의 근원인 생명의 유전자가 있고, 그 유전자로 인하여 모양이 형성되고 본성과 행동이 나타나는 존재가 생명입니다. 이는 그 모든 것이 심령과 속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육신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생명의 법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것’은 마치 여자가 남자와 동침함으로 남자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이기, 생명의 법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그 생명의 법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없는 물체, 가공품과 같은 존재들은 속에서부터 밖으로 본성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그 정체성을 확립해 갑니다. 자람이 없습니다. 더 크게 하려면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비록 안에서 밖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할 법한 것이 없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그 형태와 크기가 미리 정해진대로 만들어서 조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은,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은 그 모양과 크기가 고착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고착화된 것이 아니지만 가공품은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클지는 의사가 공부해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동차는 제 아무리 고급이라도 도면만 볼 줄 알면 그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봐도 성경을 학문으로 수용하고 있는 자들의 무식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성경을 보는 관점이 생명의 법과 같이 사람의 심령 안에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각양의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생명의 법이 있어 음란과 방탕함과 술 취함이 그친 사람이 된 것이고, 이 말씀을 보고서 음란해지지 않으려, 술 마시지 않으려 방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이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생명의 법이 없는 이방인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더불어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당연히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그것의 본질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있을 때 산 것이고, 목적을 상실하면 비록 모양이 멀쩡하고 육신의 호흡이 건강하다고 해도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자신이 성경을 보고서 그것을 문자와 문장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음란하고 술에 취한 방탕한 사람이고, 이 성경은 생명의 법이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이 자기 육신의 삶을 성경대로 살게 한다는 것을 믿고 알고 체휼한 사람은 베드로 사도의 권면대로 음란과 술 취한 방탕의 삶이 끝난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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