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선한 양심’을 이야기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고서 지금 노아의 이야기와 세례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무리하는 듯이 말씀하시기를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면 믿는 사람으로서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성경의 본질적인 의도와 사람들의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이 오류투성이인 책이거나, 아니면 지금의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전자와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본질적 관점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믿지 않음보다 못한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그냥 인생을 즐기기라도 하면 될 것이니 말입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세례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언급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행위의 씻음과 같이 생각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회복하는 것,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또 죄를 씻고 회개하는 것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하여 종교적 양심을 가지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에서, 또 사회 문제나 이슈로서 사람이 학력이나 외모, 피부색이나 성별이라는 것으로 차별하는 것을 그렇게 문제시 하는 것은 사람이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겉모습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런 문제가 사회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양심을 버린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도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면서 죽어라고 열심히 하는 돈 버는 일, 자신을 꾸미는 일들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우선 눈에 보이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으니 그것에 매몰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눈이 어둡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조차 아니라고 여기며 인생을 살면서도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니 그게 바로 어둡고 맹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양심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어두움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인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겨 그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말씀과 섞어서 위대하게 만들려는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정체성을 자기의 안목과 생명으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느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곳이 가진 정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이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런 유흥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물이 의미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 혹은 율법을 의미하는데, 세례의 경우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육신으로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서 의롭게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아름다움이 자기 배필이라는 것이고, 그런 가치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궁창 위의 물과 세상의 가치관인 궁창 아래의 물이 섞여서 노아의 홍수와 같이 물이 넘쳐나는 세계를 자기 세계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존재 정체성과 맞지 않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령의 고백이 있다면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의식이나 세례증서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군인이 꼭 군복을 입어야 군인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군복은 군인이라서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의식도 고백이 있는 사람이 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인 것을 자기 갈증을 해갈하는 것으로 여기는 교회에서 의식만 치른다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다 자기 눈가림일 뿐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의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단지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뜻하신 사람의 창조 목적대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 그 한가지입니다. 물속에서 살 수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사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가야 온전한 세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체성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 아니라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생명입니다. 이는 모두가 세상의 꼭대기로 가서 영광과 의를 얻고자 할 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수고하고 고난 받는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이 자기 본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방향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이 사람들의 눈에는 낮아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올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순복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볼 때 낮아지고 고난 받는 그 자리가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순종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 감동을 받아 바뀌는 것이니 이 보다 더한 권세와 능력이 없음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부장이 권세나 능력에 굴복해서 자기가 죄인으로 못 박은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이미지(형상)로 심겨서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나 능력으로는 예수님을 못 박았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이 가진 권세와 능력이 세상의 권세와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을 이루시기에 이 보다 더 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크게 지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마음을 돌리는 사람은 결국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성공한 사람이 많은 교회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이 권세고 능력일 것 같지만, 사람은 그 마음에 동의가 되지 않으면 다 외식입니다. 목적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자신을 낮추려 합니다. 그리고 그 낮추는 것이 말을 공손하게 하고 육신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다릅니다.


그 마음, 그 심령이 바뀌고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신의 의로 삼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으로 세상의 의를 자기 의로 삼아 살 수 없다고 교회가 부르짖고 있지만 그것이 다 속이는 것이고 기만입니다. 세례증서를 발행하는 것이 다 그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진정한 권세와 능력은 세례 곧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 의로 삼아서는 살 수 없다는 진정한 고백이 있는 사람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자기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산다는 것이고, 그것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온전한 회복이며, 그 회복은 하나님의 우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진정한 권세고 능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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