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세례라는 의식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예식이나 행위가 대단한 증거인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그렇듯 세례의 예식은 형식이고 본질이 따로 있습니다. 즉 어떤 본질적인 고백이 세례라는 예식으로 나타난 것이지, 세례라는 예식이나 행위가 세례를 받는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안다면 ‘세례 증서’나, 교계의 어떤 자격 요건에 ‘세례 받은 자’와 같은 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인데,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세례의 본질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얻은 표가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3:21)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활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세례 예식을 행하고 그 증서를 받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할 수밖에 없는 심령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신앙을 세례, 곧 바다 같은 세상의 가치관,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가치관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수밖에 없게 했던 예수님이 가지신 생명의 본성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과 심령이 세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생명과 같은 생명을 가지는 것이 먼저라서,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의 고백이고 그 고백을 확정하는 것이 세례이지,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없는데 세례 문답하고 세례 받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의 선후가 분명한 사건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가 부활의 증거라는 것은 신선한 관점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는 신앙을 시작하는 예식으로, 부활은 죽어서 얻게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상당한 시간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세례가 바로 부활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부활보다 베드로 사도가 세례의 예표라는 노아의 홍수는 계산도 어려울 정도로 먼저 있었던 사건인데도 그렇게 확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본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사람이라면 세례와 부활은 같은 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가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본능적 고백이라면, 부활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는 죽음 중에 둘 수 없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법이 같은 것입니다. 즉 이는 생명의 법과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로 이끄신 것은 십자가의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그 육신은 죽은 것이지만 그 정체성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본성을 좇아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건축자는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예수님은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야 말로 유일하게 살았다 할 수 있는 생명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이 아닌 생명이기에 살리신 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또 세상의 가치관이 죽음으로 이끌어도 그 죽은 자 중에 둘 수 없기에 살리신 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듯 율법을 육신으로 지켜서도 살 수 없고, 세상에 넘쳐나는 사람을 채워주는 각종 사상과 철학들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부활의 증거인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노아의 홍수 때에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물과 관련하여 그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심령이라는 증거입니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인 세계, 빈 그릇과 같은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관이 뒤섞여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여 성경을 눈에 보이는 몸으로 지켜내어야 의로워진다고 여기는 것에서 구분된 심령을 가지는 것이 방주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례며 구원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구분한다는 것은 그 심령이 그리스도의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영광으로 알아 자기 배필로 삼듯 하지 않으며,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알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서 자기 안에 본성으로 거듭났다는 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록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고난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 죽어야 되는 세상 가치관에 반대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야 말로 진정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기에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니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활의 심령,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생명의 본성을 가진 자, 세상이 볼 때는 거꾸로 가기에 죽여야 할 것 같아서 애매히 고난을 가하는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모습이 세례의 본질적 고백이고 또 부활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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